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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행적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기사를 쓴 뒤 한국 극우단체에 고발당한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가운데)이 8월18일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한 모습. 가토 지국장은 <조선일보>의 최보식 선임기자의 칼럼과 ‘증권가 소식통’을 인용해 청와대가 밝히기를 거부한 박 대통령의 ‘7시간’에 대해 일본어 기사를 썼고, 인터넷매체 <뉴스프로>가 이를 번역하면서 청와대가 반발했다. 이후 청와대는 고발 주체로 나서지 않고 극우단체가 고발장을 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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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뉴스분석, 왜?
“대통령 둘러싼 억측 마땅히 보도할 만”
▶ 최근 두개의 장면이 벌어집니다. 일본군 위안부 한국인 피해자의 증언을 기사화했던 한 <아사히신문> 기자와 가족이 최근 일본 우익으로부터 협박을 받습니다. 보도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기자 지지 집회를 열었습니다. 한국 검찰은 최근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을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했습니다. 찬반론이 격렬합니다. 토요판이 가토 전 지국장을 한국 언론 최초로 서면 인터뷰했습니다. 한·일 두 나라 저널리즘은 어디에 서 있을까요?
가토 다쓰야(加藤達也·48) <산케이신문> 전 서울지국장에 대한 검찰 기소가 당분간 한-일 간의 쟁점이 될 것 같다. 16일 외교부 브리핑에서 외교부 대변인과 일본 기자 사이에 공방이 오갔다.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부장 정수봉)는 지난 8일 세월호 사고 당일 박근혜 대통령이 과거 비서실장이었던 정윤회씨를 만난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한 혐의(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상 명예훼손)로 가토 전 지국장을 불구속 기소했다.
가토 전 지국장은 일본 언론 외에 한국 언론에 입장을 밝힌 바 없다. <한겨레> 토요판이 한국 언론 최초로 가토 전 지국장과 인터뷰를 했다. 애초 직접 만나 심층 인터뷰를 하고 싶었으나 산케이신문홍보실의 요청에 따라 인터뷰를 서면으로 진행했다. 지난 9월 초부터 전화로 접촉했지만 거절과 설득을 반복할 정도로, 가토 전 지국장과 산케이신문 본사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가토 전 지국장은 한국말이 유창했으나 본사의 대언론 지침에 따라 산케이신문 도쿄 본사로 지난 14일 일본어로 인터뷰 요청서와 질문지를 보냈고 가토 전 지국장이 16일 다시 일본어 답변지를 보내는 복잡한 절차를 따랐다. 이 때문에 질문과 답이 충분치 못하다. 서면인터뷰이므로 일부 오탈자 수정 외에 답변을 손보지 않고 그대로 번역해 전한다.
“내 글은 뉴스가 아니라 칼럼이다”
-언론인으로서 가토 전 지국장님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주십시오.
“1991년 4월에 산케이신문에 입사해 사회부, 외신부 등을 거쳐 2010년 11월부터 서울지국에서 근무했고 2011년 11월부터 서울지국장을 지냈고, 2014년 10월부터 사회부 편집위원입니다.”
-가토 전 지국장님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 과정을 상세히 설명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어떻게 박 대통령의 세월호 침몰 당일 행방불명에 대한 취재에 착수하게 되었습니까?
“취재 과정에 대해서는 취재원 비닉의 원칙(取材源の秘匿の原則)에 관계되므로 답할 수 없습니다. 세월호 사고는 많은 고교생이 희생되어 일본에서도 큰 관심사입니다. 그런 가운데 사고 당일 7시간 동안 소재가 명확하지 않다며 한국 내에서 논의되고 있던 박근혜 대통령의 동정을 둘러싸고 한국 내에서 억측을 부른다(憶測を呼んでいる)는 사실이, 일본에 마땅히 전달할 만한 중대한 사건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가토 전 지국장님이 취재할 당시 (산케이신문 안에서) 다른 기자나 편집자가 (가토 전 지국장의) 취재의 주제가 적당한지 논의한 바 있습니까?
“(제 글은) 뉴스는 아니고, 어디까지나 칼럼이며 지적하신 바와 같은 의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출고(出稿)할 때 체크받았습니다(チェックは受けています). 기사의 주제는 이미 2번 질문에 답한 바와 같습니다.”
이번 사건이 불거진 과정은 다음과 같다. 지난 7월 초 국회 운영위원회에 김기춘(75) 대통령비서실장이 출석했다. 김 실장은 세월호 침몰 당일 박 대통령의 소재에 대한 야당의 질문에 모른다고 답했다. 최보식 <조선일보> 선임기자가 7월18일치 ‘최보식 칼럼’에 ‘대통령을 둘러싼 풍문’이라는 칼럼을 써서 침몰 당일 박 대통령의 소재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가토 당시 지국장은 8월3일 12시 산케이신문 온라인판에 ‘박근혜 대통령은 여객선 침몰 당일, 행방불명…누구와 만났을까?’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최보식 기자의 칼럼을 주로 인용해 작성했다. A4용지 2장 분량의 가토 칼럼은 ‘국회 질의 - 박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에 대한 촌평 - 조선일보 칼럼 인용 - 증권가 소식통 인용 - 다시 조선일보 칼럼 인용 - 촌평’의 흐름으로 구성돼 있다. 두 칼럼은 대동소이해 보인다. 최 선임기자는 “대통령이 그날 모처에서 비선과 함께 있었다”는 문장 이후 과거 측근 정윤회씨를 실명 언급했다. 정상적으로 독해하면 ‘박 대통령이 정윤회씨와 함께 있었다’는 의미 외에 달리 해석하기 어렵다. 다만 최 기자는 ‘남녀관계’라는 어휘나 표현은 쓰지 않았다.
가토 전 지국장은 이 점에서 최 선임기자와 다르다. 모두 73줄(A4 출력본 기준)인 가토의 칼럼 중에 박 대통령의 ‘사라진 7시간’에 대해 남녀관계를 언급한 문장은 세 문장(1단락)이다. ‘증권가의 관계자에 의하면, 그것은 박 대통령과 남성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상대는 대통령의 모체, 새누리당의 측근으로 당시는 유부남이었다고 한다’는 문장(<뉴스프로> 번역문)이다. 일본어 칼럼에서 가토 전 지국장은 ‘證券街の關係筋’, ‘男性の關係’, ‘妻帶者’ 등의 어휘를 사용했다. 일본어 ‘스지(筋)’는 ‘소식통’을 의미하며 ‘妻帶者’(사이타이샤)는 ‘유부남’을 뜻한다. 이 세 문장을 제외하면, 칼럼은 전반적으로 박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을 다룬 것으로 읽힌다.
-기사에 등장하는 ‘증권가 소식통’은 무엇입니까? 또한 가토 전 지국장의 글은 기사입니까, 칼럼입니까?
“취재원과 관련된 것이므로 답할 수 없지만, 취재는 정확히 했습니다. 제가 쓴 것은 칼럼입니다.”
-한국의 검찰은 조선일보 칼럼의 필자는 기소하지 않고 가토 전 지국장만 기소했습니다. 이런 검찰의 기소에 대해 가토 전 지국장과 산케이신문의 의견을 알려주십시오.
“이번 기소에 관해 산케이신문의 의견은, 8일에 나온 사장 성명과 같습니다.”
세월호 당일 박대통령에 관한 의혹 제기해 기소된 가토 전 지국장
한국 언론과 첫 서면인터뷰
“날 본보기로 한국 거점으로 한
내외신 위축시키지 않을까 걱정” “대통령을 둘러싼 소문 자체를
사회현상으로 해석해 전달한 것
반드시 진실이라 보도한 것 아냐
칼럼은 그런 소문이 떠도는
배경에 대해 논한 것이다” “혐한논조?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산케이신문은 지난 10일 김진태 검찰총장과 김수남 서울중앙지검장에게 각각 항의문을 제출해 “언론자유에 대한 중대하고 명백한 침해”라고 주장했다. 적지 않은 한국인들에게 산케이신문은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 <뉴욕 타임스> <가디언> <에이피> 등은 이 사태를 보도하며 산케이신문을 그저 ‘보수매체’(conservative)라고 표현하지만, 한국 언론은 종종 ‘극우’매체로 지칭한다. 역사를 보면 그럴 만한 구석이 있다. 위키피디아 일본판을 보면, 산케이신문은 1933년 오사카 출신의 ‘신문왕’ 마에다 히사키치가 창간한 <일본공업신문>에 뿌리를 둔다. 1942년 다른 경제전문지와 통합돼 <산업경제신문>으로 이름을 바꿨다. 전쟁을 지지하는 논조를 폈다. 패전 뒤 1946년 마에다 히사키치는 신문을 통해 전쟁의식을 고취시킨 행위로 미군정에 의해 공직에서 추방됐다. 냉전 등의 이유로 미국은 추방했던 보수를 불러들였다. 마에다 히사키치는 1950년 복권돼 다시 신문사 사장이 됐다. 1958년 <산케이신문>(産經新聞)으로 제호를 바꿔 오늘에 이른다. 일본 보수 정치인들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적극적으로 보도했고 최근에는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한 고노 담화에 비판적인 보도를 많이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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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신문을 비롯한 일본 주요 신문이 박근혜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가토 다쓰야 산케이신문 전 서울지국장이 한국 검찰에 의해 불구속 기소됐다는 소식을 9일 지면에 실었다. 2014.10.9 / 도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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