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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은평구 녹번동 21-283번지에 위치한 통도사 서울 포교당인 ‘보현사’가 이 지역 주택 재개발 사업으로 헐릴 위기에 처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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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뉴스분석 왜?
여전한 강제퇴거
▶ 국회 서민주거복지특위가 지난달 말 6개월의 활동을 마무리했습니다. ‘주거 기본법’만을 제정했을 뿐, 애초 약속한 서민주거를 위한 입법활동이 전무했다는 비판이 제기됩니다. 저소득층은 소득의 절반 이상을 주거비에 쓰느라 생계가 빠듯한데도 이들을 돌보는 이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용산참사가 일어난 지 6년이 지났지만 사는 곳에서 거리로 내쫓기는 이들은 여전합니다.
‘용산참사’가 일어난 지 6년이 지났다. 철거민을 옥죈 강제퇴거에 대한 자성의 말이 오가기도 했지만, 우리 사회에 커다란 변화는 없었다. 집이 없고, 집을 갖는 일을 엄두 내지 못하는 이들, 집이 있어도 다른 이들에게 빼앗기는 이들은 여전히 주변부로 떼밀렸다. 주거권보다 재산권을, 보존보다 개발을 중시하는 관련 법제도가 크게 고쳐지지 않은 채 엄존한 탓이다.
지난 4월 서울시는 서울 청년 10명 중 3명이 ‘주거빈곤’ 상태에 빠져 있다고 밝혔다. 지하나 옥탑에서 살거나 주택이 아닌 곳에 사는 청년들이 5만8천명에 이르고, 서울 청년의 70% 이상이 월 소득의 30%가 넘는 돈을 주거비로 지출했다. 저소득층일수록 주거 부담은 는다. 한국의 집 없는 세입자 중 소득 하위 20%에 해당하는 이들은 2011년 벌이의 절반 이상인 53%를 집세와 관리비 같은 ‘주거비’에 썼다. 조금 잦아들긴 했지만, 이들이 쓰는 주거비는 지난해에도 여전히 자기 소득의 절반 이상이었다.
주거비 부담이 크다는 말은 주거권에 대한 사회적 보호가 소홀하단 뜻이다. 주거권을 보호받지 못하고 사는 곳에서 쫓겨나는 일은 용산참사 이후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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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주변 건물들은 이미 헐렸거나 주인이 떠나 텅 빈 채로 남았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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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번 주택 재개발사업장 ‘보현사’
제대로 보상 못 받고 내쫓길 판
서울 동자동·구로서도 ‘강제철거’
용산참사 6년 지나도 퇴거 여전 주거보다 재산권, 개발 중시한 탓
공용수용제도도 개발 효율에 초점
국회 주거특위는 성과 없이 종료
“서민 주거고충 무관심·무책임”
주거권 보호, 걸음마도 못 뗀 꼴 내쫓길 뻔한 직장여성아파트 입주자들 최근 서울 동자동과 구로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서울의 대표적 쪽방 밀집 지역인 동자동에선 최근 세입자들을 그대로 둔 채 강제철거가 일어났다. 지난 5월26일부터 지난달 9일까지 용산구 동자동 9-20번지 건물에선 건물주가 철거반원들을 부려 쪽방의 문을 부수고 층마다 하나씩 있는 화장실 문을 뜯어냈다. 빈방의 벽과 바닥을 허물고 각층 세면장의 수도꼭지도 폐쇄했다. 건물주는 지난 2월초 건물에 대한 구조 안전진단 결과 건물을 새로 지어야 한다며 3월15일까지 쪽방 세입자 42가구에 모두 퇴거하라고 공고했다. 거의 모두가 기초생활수급자로 달리 갈 곳이 없던 세입자들은 계속 살게 해달라며 협상을 벌였지만 결국 인근 다른 쪽방이나 다른 곳의 매입 임대주택 등지로 이주해야 했다. 철거가 이뤄진 지난달 11일에도 미처 이주하지 못한 11명의 세입자가 남았다. 건물주는 이미 지급된 공사 계약금 등을 이유로 철거를 밀어붙였다. 비슷한 시기 구로에선 근로복지공단이 자신들이 운영하는 직장여성아파트의 입주자를 강제로 내쫓는 일이 있었다. 서울남부지법은 지난달 4일 낮 12시 계약이 만료된 구로직장여성아파트 입주민 9명에 대한 명도를 집행했다. 입주민들과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기자회견을 열어 “구로직장여성아파트에 거주하는 미혼 여성 노동자 대다수가 비정규직으로, 저임금과 고용 불안을 겪고 있다. 저소득층 입주자에 대한 강제퇴거 조처를 당장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공단과의 협상 끝에 9명의 입주민은 결국 인천의 직장여성아파트에 입주했지만 이들은 또다시 주거 불안 상황에 처해 있다. 근로복지공단은 여성 노동자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자립기반을 마련해주겠다며 1998년부터 직장여성아파트를 세워 운영해왔다. 공단은 2011년 전국 6곳의 직장여성아파트를 매각하려다 무산되자 입주민과의 계약 기간을 2년(1회 갱신 최대 4년)으로 제한한 뒤 4년 이상 거주한 입주자들에 대한 퇴거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이전엔 계약기간이 따로 없었다. 시민단체들은 “애초 규정대로 입주자들의 자립기반 확보 때까지 거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떠한 공공임대주택도 갱신 거절의 사유가 없는 한 강제퇴거 조처를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보현사가 뜻대로 보상을 받지 못한 상황이나 동자동과 구로에서 일어난 강제퇴거는 모두 우리 사회가 주거권보다 재산권을, 재산의 보전보다 개발을 중시한 탓이다. 주택 재개발 사업은 사업계획이 승인되는 시점부터 토지보상법이 적용되는 공익사업이 된다. 사업을 이끄는 조합은 사업에 반대하는 조합원의 땅이나 건물, 그 밖의 권리를 취득하거나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보현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조합은 개별 반대자와의 협상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 규정상 산정된 보상액을 두고 30일 이상 협의해야 하지만 형식적 절차일 뿐이다. 토지수용위원회를 통한 이의신청도 제대로 반영되기 힘들다. 절차를 끝내면 명도 소송과 강제집행으로 이어진다. 가옥주나 세입자나 떼밀리는 신세엔 별 차이가 없다. 지난 3월 한국개발연구원(KDI)은 ‘현행 공용수용제도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을 주제로 콘퍼런스를 열었다. 발표자들은 입을 모아 “한국의 공용수용제도가 선진국에 견줘 국민의 재산권 보호보다 개발 효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호준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등은 “강제수용에 앞서 사업이 공익에 부합하고, 지나친 재산권 침해가 없는지를 검증하는 ‘사업인정절차’가 토지보상법에 규정돼 있지만 실제 따르는 경우가 거의 없다. 수용권 남용이 우려된다”고 했다. 실제 해마다 강제수용이 뒤따르는 사업이 2만여건에 이르지만 ‘사업인정절차’를 거치는 사업은 20건 내외에 불과하다고 한다. 김두얼 명지대 교수는 “근본적으로 재산권 침해를 전제로 하는 강제수용이 사회적 갈등을 유발할 가능성이 큰데도 중앙토지수용위원회는 2009년부터 2012년까지 66번의 회의에서 회의당 평균 190건 이상의 사건을 처리해 실질적 갈등 조정을 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김일중 성균관대 교수는 “한국의 수용법제에선 민간수용 추진의 용이성과 사용빈도가 상대적으로 매우 높다”며 “국민들의 신장된 권리인식에 맞춰 과학적이고 본격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했다. 일본과 독일·영국 등의 경우 강제퇴거가 여전하지만 이를 막는 제도는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 박원순 시장 취임 뒤 서울시는 2013년 2월 재개발·재건축·뉴타운 정비사업 철거 과정에서 세입자 등 사회적 약자가 거리에 내몰리는 일이 없도록 조합·세입자 간 충분한 대화를 위해 ‘사전협의체’를 구성해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사전협의체는 조합과 건물주, 세입자, 공무원 등이 참여해 세입자의 이주가 끝날 때까지 최소 다섯 차례 이상 협의하고, 합의가 되지 않으면 도시분쟁조정위원회를 열어 조정해야 한다. 하지만 법적 구속력이 없어 시나 구의 중재가 제대로 먹혀들지 않는다. 강제퇴거를 막고 서민 주거안정을 논의하겠다며 지난해 말 출범한 국회 서민주거복지특위도 별다른 성과 없이 활동을 마쳤다. 지난해 말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은 재개발·재건축을 활성화하기 위한 ‘부동산3법’(주택법·초과이익환수법·도시주거환경정비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어 비판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6개월간 서민주거복지특위를 가동하겠다고 밝혔지만 ‘주거기본법’만 처리했을 뿐이다. 올해 2월 여야가 합의했던 주택임대차 분쟁조정위원회 설치와 표준(적정)임대료제도 도입은 무산됐고, 계약갱신청구권과 전월세상한제 등은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했다. 참여연대 등 주거 관련 시민사회단체들로 구성된 ‘서민주거안정 연석회의’ 관계자는 “6개월 동안 회의는 고작 7번 열렸고, 18명의 특위 위원 중 6명은 절반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들은 서민들이 주거 문제에서 겪는 고충에 무관심하고 무책임했다”고 비판했다. 주요 선진국과 견줘보면 주거권 보호와 관련한 국내 법체계가 얼마나 소홀한지 알 수 있다. 지난달 3일 ‘무주택자의 날’을 맞아 국회 이미경 의원실 등이 연 토론회 자료집을 보면 프랑스와 독일, 영국, 미국, 일본 등에선 집주인의 재산권 못지않게 세입자의 주거권을 보호하기 위한 여러 틀거리들이 마련돼 있었다. 이미경 의원은 “이들 나라에선 세입자들이 ‘합리적 가격’에 ‘원하는 기간만큼’ 살 수 있도록 보장하고, 집주인과 분쟁이 발생해도 ‘분쟁조정위원회’를 통해 무작정 집을 잃고 길에 나앉게 되는 일을 막고 있다”고 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민생경제위원회 이유나 변호사는 “일본의 경우 집주인인 임대인이 계약 갱신을 거절하는 경우, 정당한 사유가 있어야 한다. 미국 뉴욕에서도 임대인은 임대기간 90일 전 세입자에게 갱신 의사를 물어야 하며 세입자가 더 살기 원하면 한 번에 한해 갱신할 수 있다”고 했다. 독일, 영국, 프랑스는 세입자가 월세를 연체하거나, 집주인이 직접 주택에 살아야 하거나, 재건축·재개발 등이 필요한 경우 등을 제외하곤 기간의 정함이 없는 임대차 제도를 원칙으로 한다. 지난해 국내 주거실태조사에서 자신의 집에서 사는 ‘자가 가구’는 현 주거지에서 11.2년, 세입자 가구는 3.5년을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2년 이내 이사 가구 비율은 36.6%로, 2012년 32.2%에 견줘 늘었다. 반면 독일 세입자의 평균 거주기간은 12.8년으로, 20년 이상 한곳에서 산 세입자도 전체의 22.7%에 이르렀다. 민변 민생경제위 김태근 변호사는 “우리는 계약갱신청구권이 법제화돼 있지 못한데다 전월세 가격 상승으로 이사가 잦은 탓”이라고 했다. 새누리당은 국토교통부가 발의한 기업형 임대주택, 일명 ‘뉴스테이’ 법안이 통과돼야 국회 서민주거복지특위의 활동을 연장할 수 있다고 밝혔다. 반면 관련 단체들은 이 법안이 “서민 주거안정에 역행하는 기업 특혜 정책”이라고 비판한다. 국토부가 공개한 수도권 뉴스테이 4곳의 월 임대료는 43만원에서 110만원 선이다. 김상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국토부가 전월세 난을 겪고 있는 계층이 누구인지, 이들이 어떤 상황인지, 원하는 부동산 대책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연구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라고 했다. 참사가 일어난 지 6년이 지났지만, 우리의 주거권 보호 수준은 아직 걸음마도 제대로 떼지 못하고 있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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