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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팔 신드롬’을 일으킨 티브이엔(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은 동시대 젊은이들이 겪었던 ‘미친개의 시대’의 기억은 소거하고 평화와 풍요의 이미지만을 소환해 판타지로 만든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 티브이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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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뉴스분석 왜?
‘응팔’ 신드롬 유감
▶ <응답하라 1988>(응팔)의 열풍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제작과 관련한 후일담이 끊이지 않고 서울 쌍문동은 노스탤지어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1997, 1994, 1988 등 세 편이 나온 ‘응답하라 시리즈’는 구제금융(IMF) 이후 무한경쟁 체제에서 힘겹게 사는 우리들에게 평화와 풍요의 벨에포크를 소환한 듯하다. 그런데 1980~90년대는 ‘좋은 시대’이기만 했던가. ‘쌍문동 5인방’과 동시대를 통과했으나 마냥 추억할 수만은 없는 이가 글을 보내왔다. 응팔과 다른 에피소드가 여기 있다.
티브이엔(tvN)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이 최고 시청률 21.6%(닐슨코리아 전국 기준)를 기록하며 지난달 막을 내렸다. 15일에는 작품의 배경인 서울 쌍문동에서 팬사인회가 열리는 등 ‘응팔 신드롬’은 여전히 지속 중이다.
2012년 <응답하라 1997>로 시작한 ‘응답하라 시리즈’는 <응답하라 1994>에 이어 이번 <응팔>까지 세 편 모두 시청자들로부터 ‘응답을’ 받았다. 가족드라마라는 설정이 늘 그렇지만 응답하라 시리즈의 등장인물 중 악인을 찾아보기 힘들다. 악인들이 펼치는 사건이 아니니, 드라마의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모든 에피소드는 아름답기만 하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그랬을까? 적어도 같은 시대를 살아온 내 기억 속에서 항상 그런 건 아니었다. 주인공 덕선의 쌍팔년도보다 4년 전인 1984년, 나의 고교 시절도 녹슨 곤로나 전화번호부, 회수권 등 인기를 끈 응팔 소품 속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덕선의 시간처럼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다. 오히려 처절하기만 했다.
90m 달리기+매트리스
내가 살던 곳은 쌍문동 비슷한 서울의 변두리 중곡동이었다. 1970년대 서울 외곽지역 개발 붐을 타고 부모님은 가족들이 오순도순 모여 살 집 한 칸 장만하고자 이곳에 터를 잡았다. 돈 한 푼 없이 서울로 올라와 아끼는 것 말고는 돈 벌 구석이 없던 부모님은 버는 돈의 대부분을 집 장만에 쏟아부었고, 본의 아니게 자녀 교육은 전적으로 학교에 맡겨야 했다. 그런데 중곡동을 감싸고 있던 용마산 중턱에 학교 하나가 들어서더니, 그 신흥 학교에서 서울대를 한 해 60명 이상 보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 소문은 부모님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했다. 자식이 그곳에 입학을 하고 열심히 쫓아가기만 하면 명문대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으신 것이다.
신흥 명문고에 입학한 내가 진실을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말이 좋아 신흥 명문이지, 성적이 조금 된다 싶으면 과는 아무 상관 없이 서울대라는 간판만을 위해 지원서를 써야 했다. 학생들의 꿈이나 적성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서울대 ○○명 입학’이 학교를 지배했다. 물론 나는 서울대를 갈 만한 우수한 학생도 아니었다. 나 정도의 학생은 신흥 재단의 부족한 재원을 채우기 위한 들러리에 불과했다.
입학한 지 채 한 달이 안 되어 담임선생님은 2/4분기 등록금을 내라고 했다. 부당한 일인 줄 알면서도 학생은 물론 부모님조차 항의하지 않았다. 어느 날 선생님이 교단에 올라가 말했다. 등록금 납부도 체벌로 해결하는, 학교 안 모든 문제를 군대식으로 다루는 그였다.
“등록금 이거 얼마 되지도 않는데 남자답게 내일 다 내도록!”
그때 한 학생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선생님, 등록금을 일찍 내는 것과 남자다운 게 무슨 상관입니까?”
그 친구에게 돌아온 것은 귀싸대기였다. 그렇게 미리 받아낸 등록금으로도 열악한 학교 시설은 개선되지 않았다. 가로세로도 아니고 ‘대각선’으로 최대로 벌려봐야 90m밖에 나오지 않는 운동장은 커질 줄 몰랐고, 콘크리트 철골이 흉물스럽게 드러난 건물 측면에 덧붙여 새 건물을 짓는 소음만 교실을 울렸다. ‘여고’와 ‘외고’가 그렇게 생겼다.
놀라운 크기의 운동장에서는 희한한 방식으로 체력장이 열렸다. 100m 달리기를 해야 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나. 매트리스 서너 장을 운동장 한쪽 구석에 세워두고, 학생들에게 90m 전력질주를 시킨 뒤 매트리스에 부딪히도록 ‘안전장치’를 해준 것이다. 그러고는 1초를 더해 100m 기록을 쟀다. 우리의 체력장 기록은 매트리스가 남긴 것이었다. 여고가 생긴 덕에 여학생들과의 에피소드가 있었을 거라고? <응팔>에서라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는 여고와 같은 교문을 사용함에도 등교시간을 달리해서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조치를 당했다. 그 좁은 운동장을 나누어 쓸 때도 남녀의 만남을 철저히 봉쇄했다. 그런데 <응팔>에서는 여고의 수학여행에 가서 타 학교 남학생들이 대신 노래자랑을 나가더라. 그런 일이 얼마나 자주 있었을까? 당시 고교생들은 남녀의 만남이란 날라리들이나 하는 추접스러운 일이라고 배웠다.
응팔의 기억과 내 기억은 다르다‘서울대 60명 합격’의 신흥 명문
입학하자 가난한 부모는 기뻐했다
등록금 미리 내라 때려도
아무도 항의하지 못했던 시절 대각선으로 운동장 90m 달리면
매트리스가 ‘범퍼’로 기다렸고
국민체조 하다 성적인 습격 당했다
군인 출신 대통령, ‘군인형 교사’가
지배하던 그때는 과연 행복했나 ‘자손’의 성추행 그 시대 학교에는 ‘미친개’라 불리는 교사들이 한 명씩은 있었다. 교사 폭력은 학교의 빈번한 일상이었다. 교사들은 학교를 군대로 아는지, 자기들이 하는 말에 무조건 복종을 강요했다. 조금이라도 삐딱한 발언을 하는 학생은 폭력으로 응징했다. 그나마 말이라도 하고 얻어맞으면 덜 억울했다. 국어를 담당한 ‘미친개’의 일화다. 수업이 시작되자 갑자기 발로 문을 ‘꽝!’ 차고 들어온 그는 문 바로 옆에 앉은 학생에게 “대! 이 새끼야!” 하고는 시작해 우리 반 전체 학생들의 뺨을 때리며 교실을 돌았다. 교실 구석에 앉은 마지막 학생의 뺨을 기필코 다 때리고는 시계를 보며 “이 새끼들 빨리빨리 대야지. 기록을 못 깼잖아!” 했다. 이런 사람이 우리의 선생님들이었다. 대걸레 자루나 당구장 큐대로 허벅지 때리기, 스테인리스로 된 분필꽂이로 머리 찍기 등 실로 다양한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 때려댔고, 우리는 맞았다. 어떤 선생은 발로 얼굴을 차기까지 했다. 그나마 신발을 벗고 양말 신은 발로 때려 준 것이 감사할 따름이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선생들이 자기가 때리기도 귀찮을 때, 서로에게 때리도록 강요한 일이었다. 이런 폭력이 당시 학교에서는 일상이었다. <응팔>의 학주처럼 몇 마디 훈시하고 학생을 보낸다고? 그건 촌지를 거부하며 학교 현장에 새바람을 일으킨 교사들이 주축이 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출범하고 교사 폭력이 신문 사회면 귀퉁이에나마 실릴 수 있었던 한참 뒤에나 있을 법한 일이다. 남학교에서도 성추행은 자행됐다. 이런 일에 체육 선생이 빠질 리가 없다. 그의 별명은 ‘자손’이었다. 한창 왕성하던 우리의 성기를 집중해서 만지기에 ‘남자 성기를 만지는 손’이라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체육 수업은 준비체조로 시작됐다. 그중 허리운동이 있는데, 앞으로 숙이는 동작 바로 다음에 양손을 허리에 대고 뒤로 허리를 젖히는 동작을 할라치면 최대로 뒤로 젖히는 순간을 기다려 “동작 그만!” 하고는 갑자기 우리들의 성기를 ‘철퍼덕철퍼덕’ 만져댔다. 그러고는 키득키득 웃으며 다음 동작을 시켰다. 같은 재단의 중학교를 다닐 적 미술 시간이었다. 선생이 들어와 미술 시간만의 반장과 부반장을 뽑아야 한다고 훈시하더니, 1번부터 순서대로 10명씩 교단에 서게 했다. 그러더니 선생이 우리의 성기를 한 명씩 만지고는 성기가 큰 상위(?) 두 명을 본선에 진출시켰다. 총 70명 중 본선에 오른 14명이 전반전과 후반전을 거쳐 최종 결선 진출자 5명으로 뽑혔고, 그중 2명이 선발되어 가장 큰 학생이 반장, 그다음 학생이 부반장을 맡았다. 그 뒤 미술 시간이 시작될 때 인사는 성기가 가장 크다고 인정받은 반장이 구령을 외쳤고, 마치는 시간에는 부반장이 했다. 당시 우리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조차 몰랐다. 서로 키득대기만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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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90년대 잠복해온 중고교 사학재단의 문제는 2000년 서울 상문고 사건으로 드러났다. 그해 7월 상문고 재학생과 동문이 ‘비리재단 복귀 반대’를 외치며 집회를 연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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