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어떤 메모
<밀양을 살다>, 밀양구술프로젝트 지음
오월의봄, 2014
지구화의 실제는 조지 리처의 표현대로 ‘맥도널디제이션’(McDonaldization), 미국화이다. 한편 9·11은 자본주의의 세계화에 이어 안보 패러다임의 세계화(미국화)를 가능케 했다. 9·11은 냉전 이후 군축론을 간단히 잠재웠다.
‘보통 나라’(normal state)는 하나의 전쟁에 국력을 집중해도 이길까 말까다. 그러나 ‘미국의 전쟁’은 기존의 윈 홀드 윈(win-hold-win)에서 윈윈 전략으로 한발 더 나아갔다. 두 개 이상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해도 모두 승리할 수 있도록 언제 어디서든 병력과 전투기, 전함을 갖추고 출동한다는 것이다.
맥도널드가 어느 거리에나 있듯 사정거리 1만2천㎞의 미제 유도(誘導) 미사일은 지구상 어디든 원하는 곳에 떨어진다. ‘제국’은 시장과 안보, 두 영역에서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촛불 시위는 엠비(MB) 정권만의 사건이 아니다. 이제 먹을거리 문제 같은 일상의 정치는, 누구나 데모가 인생인 시대를 열었다. 저항은 정권 비판서부터 삶의 체제(신자유주의) 전체로 확대되었다.
‘일상’처럼 계급적인 단어도 없다. 대개 일상은 반복, 아무 일 없음, 무료함을 연상시키지만 그렇게 사는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 사람들은 사는 것이 전쟁이다. ‘우리’의 일상이 ‘그들’의 예외 상태다.
남성, 노동자, 대학생만 정치적 주체라는 기존 통념은 이미지일 뿐이다. 10대 여성, 주부, 장애인, 농어민(‘할머니’, ‘할아버지’) 등 비정치적인 존재라고 간주되었던 이들이 전면에 나서면서 끈질기고 비타협적인 전투가 일상화되었다. 이는 이미 1970년대 여성노동자 투쟁, 80년대 빈민 투쟁에서 여성들이 보여준 바 있지만, 아직도 “주부‘마저’ 나섰다”고 표현하는 이들이 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지난 몇주간 세월호 사건과 이와 연계된 개인적 사연이 겹쳐 탈진한 상태였다. 주문한 <밀양을 살다>가 도착했는데 책을 펼칠 기력이 없었다. 한가하거나 별일 없는 안녕이 일상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잘 안다. 그런데도 언제나 내 꿈은 시사나 생계와 무관한 평소에 읽고 싶은 ‘아름다운’ 책을 읽는 것이다(고전, ‘야사’, 탐정, 여행…). 나는 일상 개념의 계급투쟁에서 매번 패배한다.
하지만 “세상일에 관심 끊고 무심히 살 수는 없습디다”는(207쪽) 구미현씨 표현처럼, 일상을 고대한들 소용없는 일이다. 관심을 켜고/끄고의 문제가 아니다. 안녕과 평화, 그런 것은 원래 없다. 평화는 희망과 오해가 실재처럼 된 대표적 언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일상에 빠져들었다. <밀양에 살다>는 밀양 주민들의 10년간의 정치, 일상의 기록이다. “송전탑 싸움 나와 봐도 열도 안 되는 사람들”, “남자들은 빠지고 여든살 넘은 허리 아픈 할머니들”은 말한다. 어디 이곳뿐이겠는가마는 10년 동안 대한민국 어느 지역에서 어떤 ‘국민’(김말해, 87살)의 일상은 이러하였다.
“…6·25전쟁 봤지, 오만 전쟁 다 봐도 이렇지는 안 했다. 이건 전쟁이다. 이 전쟁이 제일 큰 전쟁이다. 내가 대가리 털 나고 처음 봤어. 일본시대 양식 없고 여기 와가 다 쪼아가고, 녹으로 다 쪼아가고 옷 없고 빨개벗고 댕기고 해도 이거 카믄. 대동아전쟁 때도 전쟁 나가 행여 포탄 떨어질까 그것만 걱정했지 이러케는 안 이랬다. 빨갱이 시대도 빨갱이들 밤에 와가 양식 달라 카고 밥 해달라 카고 그기고. 근데 이거는 밤낮도 없고, 시간도 없고. 이건 마 사람을 조지는 거지. 순사들이 지랄병하는 거 보래이.”(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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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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