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푸른숲, 2005
친구가 꽃을 보내주었다. 택배 상자를 여니, 황홀한 카드와 제철 꽃다발이 물 스펀지 속에서도 싱싱했다. 의전용을 제외하면 평생 처음 받아본다. 고맙고 놀랍고 비참하기까지 했다. “연애하면 이런 거 받는 거야?” 전화했더니, “나도 못 받아봤어, 받는 거 포기하는 대신 남한테 보내자 싶어서 주소 아는 너한테 보낸 거야”. 남자에게 받는 꽃다발. 이성애의 문화적 각본을 비판하지만, 그 각본도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가 보다. 아, 나와 내 친구만 그런가?
꽃다발에서 비약해보자.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할 때가 있다. 타인의 이해와 수용의 말마디만 있다면 죽지 않고 삶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없다. 자살이 발생할 수 있는 순간이다. 사랑은 ‘오는 것’이기에 공평하지 않다. 애걸이든 강요든 노력이든, 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때, 어떤 사람이 나보다 더 절절한 심정으로 눈물이 뒤범벅된 채 “내 목숨을 다해 당신의 상처를 위로하고 싶다”고 말한다면, 나 역시 아무에게라도 목숨을 바칠 것이다.
우리 시대의 도반(道伴), 공지영. 나는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1989)부터 그의 독자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이 작품은 서사와 구조가 다 좋지만 읽기 쉽지는 않다. 10년 전, 나는 엉엉 울면서 읽었다. 사형제도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의미도 있지만, 내게는 가난하고 사랑받지 못한 한 인간이 우주에 잠깐 머물다 간 이야기다. 윤수 같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중산층 빼고는 상황이 비슷한 여자 주인공 유정보다, 강간 살인 용의자 윤수와 동일시하며 읽었다.
내가 이 작품에서 느끼고 배운 장면들. 범죄와 계급, 굶주림, 어린이가 당하는 폭력, 성폭력 당하면서 형을 찾는 소년의 비명, 너무나 이해받고 싶지만 포기와 갈망의 반복, 내 마음을 다른 사람이 먼저 열어주었으면 하는 심정, “내가 이런 사람인데도 얘기하고 싶냐”는 반항,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사는 이들이 상처 하나로 서로를 수용하는 기적, 살인과 자살 충동 그 사이에서 자포자기의 시간을 견디는 것, 내가 죽는 날짜를 정확히 아는 삶….
사형 집행 전, 윤수는 편지를 남긴다. “혹여 허락하신다면, 말하고 싶다고… 당신의 상처받은 영혼을 내 목숨을 다해 위로하고 싶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신께서 허락하신다면 살아서 마지막으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내 입으로는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그 말, 을 꼭 하고 싶었다고… 사랑한다고 말입니다.”(290쪽) 이 사람은 말하는데 왜 이토록 많은 허락을 받아야 하는가.
여러 가지 눈물이 있다. 물기, 흐름, 통곡… 만일 타인의 도움이 필요할 때 이 구절이 생각나고 서러움의 눈물이 쏟아지는데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강한 사람이다. 당신은 이렇게 말한다. 간절히 받고 싶지만 포기했고 대신 마음 놓고 줄 수라도 있다면 행복합니다. 그래도 될까요? 저 같은 사람이 당신을 사랑해도 될까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이런 꽃다발조차 팽개치는 것 같다. “내 목숨을 다해 타인의 영혼을 위로하는 것”, 희생처럼 보이는 이 행위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럴 만한 사람을 찾아 헤매야 하는 현실이다. 비록 나 자신을 위한 사랑일지라도, 나의 선의를 당연한 권력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자기만족 행위여서 주는 것이 ‘쉽다’. 반면, 남의 마음을 제대로 받을 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조금 사랑받는다 싶으면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챙길 것은 챙기고, 모욕을 주고, 자기도취로 오만하다. 사랑과 위로는 약자가 하는 일? 이것은 시대정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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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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