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승부 타자 호세 vs 투수 니퍼트
▶ 지난달 말 펠릭스 호세가 부산 사직야구장을 찾았습니다. 1999년과 2001년, 2006~2007년까지 롯데 자이언츠에서 뛰었던 바로 그 호세 말입니다. 롯데의 초청으로 6년 만에 다시 한국을 방문한 호세를 보며 많은 야구팬이 잠시나마 옛 추억에 젖었습니다. 두산의 더스틴 니퍼트처럼 빼어난 에이스급 투수도 좋지만, 제2의 호세를 기다리는 마음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이번 시즌 19명의 외국인 선수는 모두 투수입니다. “3할을 원하는가, 30홈런을 원하는가.” 포털사이트 네이버 검색창에 사람 이름 ‘숀 헤어’를 입력한 뒤 엔터 키를 누르면 다소 긴 연관 검색어가 하나 뜬다. 특이하게도 단어가 아니라 어쩐지 자신감이 뚝뚝 묻어나는 문장이다. 해태 타이거즈 팬의 가슴속에는 쓰라린 상처로, 다른 구단 팬에게는 ‘먹튀’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그 이름, 숀 헤어라는 선수가 있었다. 숀 헤어가 한국 땅을 떠난 지는 이미 오래지만, 그가 남긴 주옥같은 명언들은 십수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 있다. 추억의 시작은 1998년 5월의 광주 무등야구장이었다. 그날 광주 무등야구장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로 경기가 취소된 가운데 당당한 체구(키 185㎝, 몸무게 91㎏)의 백인 사내가 몇몇 구단 관계자와 함께 경기장을 찾았다. 1991년부터 1995년까지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모두 64경기를 뛴 ‘전직’ 메이저리거 숀 헤어였다. 그때 나이는 서른이었다. 해태가 모셔온 숀 헤어의 쓰라린 추억 외국인 선수 도입 첫해였던 그해에 해태는 빠듯한 예산으로 팀을 꾸려가야 했다. 모기업인 해태가 1997년 말 외환위기(IMF 사태)를 겪으며 크게 휘청이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 8개 프로야구 구단 가운데 6개 구단이 두둑한 재정을 바탕으로 너도나도 좋은 외국인 선수를 뽑고 있을 때, 해태는 역시 주머니가 가벼웠던 쌍방울 레이더스와 함께 외국인 선수 없이 시즌을 시작했다. 팀 성적이 좋을 리가 없었다. 시즌 초 해태는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김응용 감독은 구단에 선수 보강을 여러번 촉구했다. 다른 팀처럼 두명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한명의 외국인 선수는 있어야 시즌을 꾸려갈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광주를 찾은 선수가 숀 헤어였다. 좌타자와 외야수가 부족한 해태였기에 왼손잡이 외야수 숀 헤어의 가세는 큰 힘이 됐다. 적어도 계약할 때까지는 그럴 줄 알았다. 5월 초 한국을 찾아 입단 절차를 모두 밟은 숀 헤어는 입국 첫날 광주 무등야구장을 찾아 경기장을 둘러봤다. 소감을 묻는 구단 관계자에게 메이저리그 출신 숀 헤어는 귀찮다는 듯 한마디 툭 던지고 구장을 빠져나갔다. “여기서는 외야 펜스를 넘겨야 홈런인가, 아니면 장외까지 넘겨야 홈런인가.” 메이저리그에 견줘 야구장 크기가 작다는, 거만하게 들릴 수 있는 발언이었다. 무등야구장의 크기는 좌우 담장까지의 거리 99m, 중앙 담장까지의 거리 120m로 결코 작은 편은 아니었다. 그가 남긴 이 말은 계약 당시 내뱉었다는 “3할을 원하는가, 30홈런을 원하는가”라는 말과 함께 많은 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아니나 다를까 숀 헤어는 5월18일 한국 데뷔 경기(쌍방울 레이더스전)에서 안타 2개에 타점까지 하나 올리며 좋은 활약을 펼쳤다. 거기까지였다. 메이저리그 출신답지 않게 불안한 수비로 경기를 말아먹는가 하면, 찬스 때마다 찬물을 끼얹는 헛스윙을 연발했다. 시즌 성적은 타율 0.206에 홈런 0개에 그쳤다. 해태 구단 관계자들은 그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숀 헤어는 손해여…”를 읊조리곤 했으니, 이래저래 그는 기록을 남기기보단 어록을 남긴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여기까지는 프로야구 외국인 선수에 관한 ‘야사’의 일부다. 김은식 야구칼럼니스트가 쓴 책 <기아 타이거즈 때문에 산다>를 보면 숀 헤어의 “장외까지 넘겨야 홈런인가” 발언은 무등야구장의 이중 펜스를 보며 앞뒤 펜스 가운데 어떤 것을 넘겨야 홈런인지 묻는 질문이었다. 프로야구 무대에 외국인 선수가 등장한 것은 올해로 16년째다. 한국 야구 수준의 질적 향상과 선수 개인 기량의 발전이 꾸준히 이뤄지며, 한국을 찾는 외국인 선수의 면면도 크게 달라졌다. 지난 시즌부터 도드라진 현상은 ‘외국인 타자의 멸종’이다. 한국 프로야구 무대를 밟은 마지막 외국인 타자는 2011년 시즌 때 넥센 히어로즈에서 뛴 코리 알드리지와 한화 이글스에서 활약한 카림 가르시아가 마지막이다. 지난해 8개 구단, 올 시즌 9개 구단은 최대 2명(신생 구단 엔씨 다이노스는 3명)까지 보유할 수 있는 외국인 선수를 모두 투수로 채웠다. 특히 올해는 기아 타이거즈의 마무리 앤서니 르루를 뺀 18명이 모두 선발투수다. 과거 한국 프로야구 거쳐간가장 빼어난 외국인 타자는
롯데 괴물타자 펠릭스 호세
천부적 파워, 정교한 선구안
한 경기에 양손 홈런 치기도 현재 국내 무대에서 뛰는
가장 빼어난 외국인 투수는
두산의 선발 더스틴 니퍼트
상체 세워 내리꽂는 직구는
타자 앞에서 살짝 휘는 ‘마구’ 외국인 투수의 초강세는 국내 투수 가운데 긴 이닝 동안 타자를 구위로 확실히 압도할 만한 선수가 많지 않다는 사실을 뜻한다. 한국 프로야구 무대에서 3할의 타율과 30개 이상의 홈런을 쳐줄 외국인 타자를 구하는 것도 예전처럼 쉽지만은 않다. 조현봉 롯데 자이언츠 운영지원매니저는 “구단마다 국내 선발투수 가운데 10승 이상을 안정적으로 올려줄 수 있는 선수가 사실 별로 없다. 우리 롯데만 해도 10승의 보증수표는 송승준 정도에 불과하다. 다른 팀도 국내 선수로 5선발을 모두 채우기가 쉽지 않다는 건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무늬만 메이저리거인가, 진짜 메이저리거인가 외국인 선수 제도를 만든 초기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1998년 해태가 좌타 공백을 메우려고 숀 헤어를 데려온 것처럼 팀 타선의 빈구석을 외국인 타자로 메우려는 시도가 많았다. 해태에서 숀 헤어가 뛰고 있을 때 엘지(LG) 트윈스에는 주니어 펠릭스, 현대 유니콘스에서는 스코트 쿨바 등이 활약했다. 오비(OB) 베어스는 1루수 타이론 우즈와 2루수 에드가 캐세레스 등 내야에만 두명의 외국인 타자를 몰아넣었다. 한화 이글스도 유격수 조엘 치멜리스와 3루수 마이크 부시 등 외국인 선수 두명으로 내야의 절반을 채울 정도였다. 그해에 프로야구 무대에서 뛴 선수는 모두 12명이었는데, 타자가 8명이었다. 이듬해인 1999년에는 타자 편중이 더 심해져, 모두 16명의 외국인 선수 가운데 투수는 쌍방울에서 뛴 마이클 앤더슨과 제이크 비아노, 롯데의 마이클 길포일(시즌 중반 에밀리아노 기론으로 교체) 등 단 세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바로 그해 어록이 아닌 기록을 남긴 외국인 타자가 등장했다. 롯데의 펠릭스 호세였다. 사실 펠릭스 호세는 한국에 진출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화제를 모은 선수였다. 숀 헤어처럼 메이저리그의 냄새만 맡은 ‘무늬만 메이저리거’가 아니라 진짜 메이저리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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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화끈해서 걱정 끼쳤다면
니퍼트는 모범적인 젠틀맨
코치들은 ‘무한 믿음’ 보내 지금 각 구단 1~2선발은
모두 외국인 투수 일색
10승 이상 확실히 보증하는
선발투수가 부족하다 보니
타자 수급보다 일단 선발! 외국인 투수가 3년 연속 잘 던지기란 불가능하다는 ‘외국인 투수 3년차 징크스’도 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지금까지 한국을 거쳐간 외국인 투수의 세번째 시즌은 험난했다. 1999년 호세와 함께 롯데에 입단한 에밀리아노 기론은 첫 시즌 5승1패, 두번째 해에는 10승8패를 기록하며 쏠쏠한 활약을 펼쳤으나 3년차였던 2001년 부진에 빠져 골칫덩어리로 전락했다. 기아 타이거즈와 두산을 거친 마크 키퍼도 첫해 기아에서 19승을 거둔 뒤 두산으로 이적했으나 데뷔 3년째였던 2004년 7승9패 방어율 4.69의 초라한 성적을 마지막으로 남긴 채 한국을 떠났다. 롯데의 외국인 투수 라이언 사도스키, 현재 넥센에서 뛰고 있는 브랜든 나이트도 3년차 징크스를 피해가지는 못했다. 일단 한국 타자에게 구위나 투구 패턴을 읽히면 낯선 외국인 투수로서의 장점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강력한 직구를 갖고 있는 니퍼트는 달랐다. 시즌의 절반을 소화한 7월5일까지 그는 8승을 거두고 있다. 니퍼트는 월등히 큰 키로 타자에게 압박감을 안겨주는 흔치 않은 유형의 선수다. 니퍼트의 키는 203㎝. 투구 폼이 완벽한 정통파에 가까운데다 윗몸을 꼿꼿이 세운 채 던지기 때문에 공을 놓는 지점, 곧 릴리스포인트가 대단히 높다. 릴리스포인트가 높다는 것은 똑같은 변화구를 던져도 더 크게 휜다는 뜻도 된다. 공을 던지는 폼도 간결해 타격 타이밍을 맞추기도 쉽지 않다. 그가 위에서 내리꽂는 직구는, 비유하자면 2층에서 1층 아래로 던지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 여기에 한가지 비밀이 더 있다. 니퍼트의 직구는 위에서 내리꽂을 뿐 아니라 홈 플레이트 근처에서 살짝 한번 더 떨어진다. 싱킹 패스트볼 혹은 투심과도 비슷하다. 김정준 <에스비에스 이에스피엔> 해설위원의 평가다. “니퍼트의 가장 큰 강점은 위에서 내리꽂는 각도 큰 직구다. 게다가 볼 스피드가 150㎞를 웃도는데, 이건 한국 타자들로서는 분명 상대하기 까다로운 그만의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직구 이외에는 체인지업과 슬라이더, 커브 등 네가지 변화구를 던지는데, 체인지업과 슬라이더가 특히 좋다. 세가지 구질의 변화구 모두 B+에서 A 정도는 된다고 본다.” 니퍼트는 ‘두산 투수력의 40%’ 투수 출신인 손혁 <엠비시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도 니퍼트를 올 시즌 최고의 외국인 선수 가운데 한명으로 꼽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올 시즌 최고의 외국인 투수는 두명이다. 좌완 에이스가 에스케이(SK) 와이번스의 조조 레이예스라면, 우완으로는 니퍼트였다. “니퍼트의 경우 150㎞가 넘는 속구를 타자의 몸쪽과 바깥쪽으로 정확히 찔러 넣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외국인 투수는 대개 힘에 의존하는 투구를 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제구력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니퍼트는 구위와 제구를 다 갖춘 몇 안 되는 투수다.” 롯데에서 뛰었던 호세가 구단 관계자에게 뛰어난 성적으로 기쁨을 안겨준 동시에 화끈한 성격으로 늘 걱정을 끼쳤다면 니퍼트는 반대 사례에 속한다. 늘 꾸준한 활약을 펼치며 팀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비슷하지만 호세와 달리 야구를 대하는 자세나 생활 태도도 대단히 모범적이라는 것이 두산 관계자의 평가다. 특히 정명원 두산 투수코치는 니퍼트를 가리켜 ‘두산 투수력의 40%’라고 할 정도로 그에게 큰 믿음을 보이고 있다. “마운드 위든 어디든 항상 ‘젠틀’하고 꾸준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그를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 만든 원동력이라고 본다. 현재 두산 1군 투수가 모두 12명인데 1군 투수력의 40%를 니퍼트 혼자 차지하고 있다. 다른 투수들이 좀더 잘해주면 좋은데, 아직은 가지고 있는 능력만큼 해주는 투수가 많지 않아서 니퍼트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편이다. 팀이 연패를 하고 있을 때 꼭 필요한 1승을 해줄 수 있는 선수가 바로 니퍼트다.” 니퍼트에 대한 정명원 코치의 무한한 믿음에서 알 수 있듯, 에이스급 외국인 선발투수는 감독 등 코칭스태프를 기쁘게 한다. 반면 폭발적인 장타력을 갖고 있는 외국인 타자는 팬을 춤추게 한다. 제2의 펠릭스 호세, 타이론 우즈, 카림 가르시아가 당분간 나올 수 없다는 현실은 분명 아쉬운 일이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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