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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4.11 18:06 수정 : 2012.10.25 13:52

[매거진 esc] 인간 반전
화가에서 익스트림 마라토너로 변신한 안병식씨

삶이 변곡점을 그리는 순간이 꼭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찾아오는 것만은 아니다. 미술대학에서 조용히 그림을 그리던 남자는 그저 운동화 끈을 고쳐 매고 묵묵히 달리기를 시작했을 뿐이다.

예술은 몸을 망가뜨리며 해야 제맛인 줄 알고 밤낮을 바꿔가며 살던 어느 날, 제주대학교에서 ‘5㎞ 건강 달리기’ 대회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학교에서 처음 열리는 대회였고, 마라톤이 대중화된 시기도 아니었기 때문에 5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조촐하게 제주의 자연을 달리기 시작했다. 숨이 가빴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처럼 ‘길이 끝날 때까지’ 달리는 건 애초에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한 사람. 콧물을 훌쩍거리며 고통스럽게 달리고 있는 그의 곁으로 190㎝가 넘는 장신의 외국인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아, 포레스트 검프다!’ 그는 남들보다 빠른 속도로 결승점을 통과했다. 한 달 뒤 버스 막차에서 포레스트 검프를 닮은 그 외국인을 다시 만났다.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평소 그답지 않게 무작정 다가가 말을 걸었다. “지난번 마라톤 대회에서 달리는 걸 봤는데 너무 멋있었다, 괜찮다면 너와 함께 달리고 싶다고 했더니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약속은 따로 하지 않고 주말마다 같은 장소에서 만나 달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극한의 마라토너 안병식씨가 달리기와 맺은 인연의 시작이다. 지난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그는 평소처럼 가벼운 운동복 차림이었다.

안병식 화가

profile

제주대 미술학과 졸업. 서양화를 전공하던 중 1998년 5km 건강달리기를 시작으로 마라톤 시작. 울트라 마라톤(2001, 2002), 철인 3종 경기(2003), 사막 마라톤(2005), 남극 마라톤(2007)과 북극점 마라톤(2008) 등 참여. 중국 고비사막 대회(2006)와 북극점 마라톤에서 우승.

“1등이나 꼴찌나
해냈다는 사실만으로
모두가 칭찬받아 뿌듯”

평소 체력이 좋은 편도, 달리기를 꾸준히 해오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무작정 시작한 달리기는 심장을 조여오기 일쑤였다. 외국인 리처드는 저만치 앞서 달리다 수시로 뒤를 돌아보며 ‘괜찮냐’고 물었다. 솔직히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이를 악물고 새로 사귄 친구와 한라산으로, 오름으로, 제주의 이곳저곳을 부지런히 밟아 나갔다. 친구가 떠난 뒤에도 달리기는 계속 이어졌다. 하프 코스 마라톤에 이어 100㎞ 울트라 마라톤, 내친김에 철인 3종 경기에 도전했다.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삶의 패턴과 가치관이 달라지는 것 같았다. 좀더 규칙적으로 살게 되었고, 그림은 밤에 그려야 한다는 생각도 바뀌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보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지만, 달리기와 제주의 자연이라는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

그렇게 시작한 마라톤이 결국 그를 사막으로 이끌었다.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학원 강사로 일하며 간간이 그림을 그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신문에서 이집트 사막 마라톤 대회에 관한 기사를 접한 뒤 그동안 모아놓은 500만원을 탈탈 털어 참가비를 내고 이집트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난생처음 떠나는 해외여행. 낮에는 뜨거운 태양을 짊어지며 달리고, 밤에는 사막의 별을 보며 잠드는 생활은, 생각만 해도 흥분되고 새로울 것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얼떨결에 저지른 충동적인 선택이 삶의 좌표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는 현재 그림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지구를 달리는 사람이다. 짧게는 4박5일, 길게는 한 달 가까이 오직 달리기에 집중하며 지구의 모든 오지를 통과한다. 사막 마라톤 그랜드 슬램이라 불리는 중국 고비, 칠레 아타카마, 아프리카 사하라, 남극 대륙을 모두 통과하고 자원봉사자로도 참여했다. 생애 두번째로 참가한 중국 고비 사막에선 1등의 영광도 안았다. 남극부터 북극점까지 극한의 지역을 두루 지나 베트남과 히말라야, 남들 다 걸어서 가는 스페인의 순례길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뛰어서 통과했다. 프랑스 횡단 뒤 일주일 만에 독일 횡단대회에 연달아 참가하는 믿기 어려운 도전도 서슴지 않았다. 하루 평균 70㎞를 한 달 넘게 달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해에 독일과 프랑스 횡단에 모두 도전해 성공한 사람은 그가 처음이라고 한다. 스스로 1만㎞는 족히 달린 것 같다고 자신하는 안병식씨는 이렇게 많은 시간을 달리면서 살았다. 여태껏 달리기에 쏟아부은 돈만 1억5000만원이다. 1억여원은 노스페이스와 제이디시(JDC) 등의 기업 협찬을 받았고, 나머지 경비는 미술학원 강사로 일하며 번 돈으로 충당했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걱정도 많았지만, 이것까지만 하고 다시 생계를 위해 일해야지 하다가 계속 꿈이 커졌다. 남극 대륙까지 사막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고 났더니 북극점에 가고 싶어졌다. 8대륙을 정복하고 나니까 이제 전 대륙 횡단의 꿈이 생긴다. 열정이 사라지지 않는다.”

“제주도에서 대회 만들어
하루는 오름, 하루는 해변
달리면 얼마나 멋질까”

익스트림 마라톤에 매혹된 이유는 간단하다. 대회에선 1등만 박수를 받는 것이 아니다. 1등이나 꼴찌 모두 해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칭찬을 받는다. 다 함께 손을 잡고 결승점을 통과하는 경우도 많다. 몇 시간 달리고 끝나는 대회가 아니기에 함께 극한을 이겨낸 사람들끼리 설명할 수 없는 동지애를 느끼게 된다. 함께 먹고 잠들면서 이국의 문화를 체험한다. “나는 오지를 달리면서 가장 화려한 세상을 만난다고 생각한다. 자연의 가장 위대한 작품, 바로 사람을 만나는 거다.”

요즘 그는 달리기를 잠시 쉬고 있다. 두 달 이상 평균 70㎞씩 달리는 미국 대륙 횡단을 코앞에 두고 의사의 만류로 결국 레이스를 포기했다. 무리한 유럽대륙 횡단으로 인대 부상을 입어 예전만큼 달리는 것이 쉽지 않아졌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달리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내가 참가했던 세계의 수많은 익스트림 마라톤 대회를 제주도에 만들고 싶다. 익스트림 마라톤은 며칠씩 달리면서 사람을 만나고, 그 나라를 여행할 수 있는 매력적인 행사다. 동료 마라토너들에게 제주의 아름다움을 소개하고 싶다. 하루는 오름을 달리고, 다음날은 해변을 달리고, 또 다음날은 한라산이나 제주 목장을 달리면 얼마나 멋지겠나.” 그는 지금 세계의 많은 마라토너를 제주로 불러 모으는 ‘트레일런 제주’(www.trjeju.com) 행사를 준비중이다. 내친김에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남북한 1000㎞를 달리고픈 꿈도 가지고 있다.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은 달리기를 시작한 지 몇 년 만에 ‘이제 쉬고 싶다’며 털썩 주저앉았지만, 그의 달리기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오래 달린 만큼 열정도 오래, 거침없이 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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