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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상상아카데미가 발간한 고교 과학교과서의 시조새 화석 사진. “1861년 독일의 조른 호펜의 석회암에서 최초로 발견됐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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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쏙] ‘한국, 창조론자들 요구에 항복’ 파문
영국의 과학저널 <네이처>와 미국 시사주간 <타임> 등이 창조론자들의 요구로 한국 과학교과서에서 진화론을 설명하는 시조새 등이 삭제된다는 기사를 잇따라 내보내 파문을 일으켰다. 진화학계에서는 창조론자들의 요구가 학문적으로 맞지 않다고 반박하며 삭제에 반대하는 청원을 교육과학기술부에 제출해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네이처 ‘삭제방침’ 보도뒤“지적수준 높은 한국에 실망”
외국서 빈정·우려 글 잇따라 진화론개정추진회 삭제 청원에
진화론자들 항의 청원
“개정추진회, 학문 흐름 왜곡” “세계적으로 개인의 지적 수준이 제일 높다고 알려진 나라에서 벌어진 이번 일은 무척 실망스럽다.”(미국 과학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카> 기사 댓글) 유명 과학저널 <네이처>가 지난 5일 ‘한국, 창조론자들 요구에 항복하다’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낸 뒤, 외국에서 우려하는 댓글들이 잇따랐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여러 차례 우리나라 교육을 모범사례로 추켜왔던 터여서 “미국이 커져서 이동했나보다” 등 빈정 섞인 글들도 눈에 띄었다. 미국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종교적 배경의 일부 학자들이 진화론을 부정하는 주장을 내놓은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번처럼 그 주장이 정부 차원에서 받아들여진 것은 처음이다. 가뜩이나 종교 편향으로 구설에 오른 정부에서 벌어진 일이라 시선이 곱지 않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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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교학사가 발간한 고교 과학교과서에 실려 있는 말의 화석계열 그림. 말이 몸집이 커지고 발굽 숫자가 줄어드는 쪽으로 진화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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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부 안이한 대응이 파문 불러…뒤늦게 “전문가 의견 묻겠다” 지난해 고등학교를 입학한 신입생들은 2009년 개정된 교육과정에 따라 만들어진 ‘융합형’ 과학교과서로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과학 교육과정은 교과서를 제1부 ‘우주와 생명’, 제2부 ‘과학과 문명’으로 나누어 만들되, 1부에서 ‘생명의 진화’를 다루도록 하고 있다. 교육과정은 한국과학창의재단(창의재단)이 개발했다. 이덕환 서강대 교수(화학)는 “교육과정은 진화와 관련해 서술해야 하는 주요 골격만 제시한다”며 “출판사들이 낡은 근거들을 가져다 쓰면서 문제를 일으킨 것”이라고 말했다. ‘시조새 삭제·수정’ 파문은 2009년 고교 과학교과서의 발행체계가 ‘검정’에서 ‘인정’으로 바뀌면서 교과서 수정 절차가 느슨해지고 교육과학기술부가 안이하게 대처해 불거졌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인정교과서는 국정교과서나, 검정교과서와 달리 출판사가 집필해 시·도 교육청에 인정 심사 요청을 하면 큰 틀에서 주요 사항을 점검해 승인해준다.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는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회가 ‘진화론 개정’ 청원을 넣은 것은 이런 빈틈을 활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윤경숙 교과부 수학교육정책팀장은 “국민 신문고를 통해 청원이 들어오면 해당 기관은 1~2주일 안에 응답해줘야 해 출판사를 통해 답변을 보내줬다”고 했다. 교학사는 이미 올해 3월 새로 발행한 과학교과서에서 시조새 그림을 삭제했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는 “교육과 학문을 책임지는 교과부가 진화학 전문가들에게 한마디 문의도 없이 일을 처리해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점은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김동원 창의재단 교육과정개발실장은 “교진추 청원에 대한 반대 청원에 대해서는 진화생물학자들에게 의견을 구하기로 하고 관련 학회에 전문가 추천을 의뢰했다”고 말했다. 이근영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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