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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5.29 20:39 수정 : 2012.05.29 20:39

이상적 재상-왕도정치 군주로
서로 알아보고 조선개혁 앞장
총애 질시로 다산 18년 유배도

“정조는 정약용이 있었기에 정조일 수 있었고, 정약용은 정조가 있었기에 정약용일 수 있었다.”

위당 정인보 선생의 말이다. 정조와 정약용의 관계를 가장 정확히 드러내 주는 말일 것이다. 이들의 만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두 사람의 만남을 ‘풍운지회’(風雲之會)로 묘사하고 있다. 바람과 구름이 만나 백성에게 이로운 비를 내리는 것이니, 두 사람의 만남은 단순히 군주와 신하의 만남이 아닌 백성을 위한 운명적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정조를 빼놓고 정약용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의 묘를 현륭원으로 이장할 당시 (정조의 명을 받아 다산이) 한강을 가로질러 배다리를 놓고 화성을 쌓은 것은 다산과 정조의 특수한 관계를 보여주는 수많은 일화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정조는 화성 축성이 끝난 뒤 다산을 불러 ‘네가 거중기를 만들어 무려 4만냥이나 절감하였구나!’라고 극찬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다산과 정조를 이해하고자 한다.

이 두 역사적 인물의 관계는 화성으로 드러난 인연에 그치지 않는다. 정약용은 정조의 개혁정치에서 실질적인 일을 추진한 인물이다. 정조의 개혁 정책은 척신을 멀리하고 현인을 우대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다. 척신이라 함은 단순히 외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국왕과 왕실에 관여된 인물들 전체를 말한다. 정조가 척신을 멀리하고 자신의 세력을 육성해 조선을 새롭게 변화시키려고 노력할 때 그 옆자리에서 정조의 정책과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함께 노력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정약용이다.

정약용과 정조의 만남은 운명적이다. 정조가 정약용을 처음으로 만난 건 1783년 세자 책봉을 기념해 열린 증광감시의 합격자들을 축하하기 위해 어전으로 이들을 불러들였을 때였다. 처음 정약용을 본 정조는 얼굴을 들라고 말하며 “몇 살인가?”라고 물었다. 조선시대 국왕이 대과에 급제한 신하도 아닌, 기껏 생원시에 합격한 미관의 청년에게 자신의 용안을 보여 주는 일은 극히 이례적이었다. 정약용은 임오생이라고 대답했다. 정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임오년, 곧 1762년에 태어난 그에게 호감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정조의 의도적 만남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우연한 만남이었는지는 문헌상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그 뒤 특별하게 발전하였다. 성균관 유생들 전체에게 정조는 <중용>에 대한 80여개조의 질문을 내려주었는데, 다산은 중용에 대한 해석에서 퇴계 이황의 학설을 따르지 않고 율곡 이이의 학설을 따라 정리했다. 정조는 이때 최고의 점수를 정약용에게 주었고 그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정조가 군복을 입은 모습을 담은 어진봉안전.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숭무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사도세자가 군복을 입고 행차하던 모습을 본떠 자신도 군복을 입은 초상화를 그렸다. 2004년 수원시에서 제작한 표준영정이다. 수원화성박물관 제공
일반적으로 남인은 퇴계의 학설을 따르고 노론의 경우는 율곡의 학설을 따르는 것이 조선후기 사회의 일반적 현실이었다. 당쟁은 그렇게 사상의 차이를 가져왔고, 서로 한마을에 살아도 당파가 다르면 평생을 인사하지 않고 살았다. 그러한 시대에 다산은 남인의 명문가 자제였는데도 율곡의 학설이 옳다고 생각해 그를 따랐으니 정조의 눈에 다산은 균형 잡힌 시각을 지닌 신하로서 조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인물로 보였던 것이다.

정조는 정약용을 훗날 재상감으로 보고 다양한 교육과 체험을 시켜주고 국가에서 편찬하는 서적을 내려주었다. 외가인 해남 윤씨 집안 사람들을 닮아 살이 쪄서 운동을 잘 못하는 다산에게 활쏘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아예 훈련도감에 들어가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더불어 정조는 정약용을 조선의 군대를 운용할 수 있는 지휘관으로 키우기 위하여 무반 교육을 시키기도 하였다.

다산이 성균관 유생 시절 정조로부터 하사받은 <당송 팔자백선>(왼쪽)과 문과에 합격한 뒤 받은 <병학지남>. 정조는 다산을 무반으로 키우려고도 생각했는데, 그런 뜻으로 하사한 책이 바로 <병학지남>이다. 수원화성박물관 제공
1783년 첫 만남 뒤 17년간
백성을 위한 나라 만들기
정조 죽음으로 결국 미완

다산에 대한 정조의 사랑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다산은 수시로 보는 성균관 시험에서 1등으로 합격하여 선물을 받았고, 정조가 주관한 성균관 특별 시험에 합격한 뒤 최종 시험인 전시로 나가 2등을 차지하는 영예도 얻었다. 정조는 조정에서 발간한 여러 책을 모두 주어 더 줄 책이 없자 ‘그렇다면 술이나 한잔 하자꾸나’라고 권했다. 창덕궁 세심대에서 꽃구경을 하다 술 한잔 마시고 시를 지을 때 자신의 어탁을 내어주어 다산에게 시를 쓰게 할 정도였다. 다산과 정조의 친밀한 관계는 더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물론 다산에 대한 정조의 총애를 두고 위당 정인보 선생은 “이러한 사랑으로부터 다산의 화란이 시작되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과도한 총애를 받은 나머지 정적들이 만들어졌고 18년간의 유배생활까지 했다는 것이다.

정조가 다산을 총애한 것은 그가 학문이 높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조는 다산을 통해 암행어사와 목민관의 모범을 세우려고 하였다. 정조는 자신의 신임을 믿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수령들을 다산으로 하여금 탄핵하게 하였고, 금정찰방과 곡산부사로 보임시켜 백성을 위한 목민관의 역할에 충실하게 하였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다산을 채제공의 뒤를 잇는 정승으로 삼아 자신과 국사를 함께 하기 위함이었다.

정조의 가장 원대한 꿈은 바로 조선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1778년 6월 발표한 국정개혁안에서 천명한 대로 백성들을 모두 부유하게 만들고, 인재를 육성하고, 외세에 침탈당하지 않는 나라를 만들고,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정조가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국왕이 정통성을 확보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될 수도 있지만, 생부 사도세자가 역적으로 몰려 죽은 이상 이 일은 정조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한 사안이었다. 따라서 사도세자 추숭 문제는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정조에게는 이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명분과 논리를 만들 최측근이 필요하였고 그 일을 다산이 수행하였다. 정약용은 사도세자가 당쟁의 희생자라고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혜경궁 홍씨 회갑연에 맞춰 사도세자의 시호를 추숭해야 한다는 정약용의 주장은 정조를 만족시켰고, 그 주장은 결국 실현됐다.

정약용은 오늘날 민주주의 제도의 이론적 근거가 될 수 있는 ‘탕론’을 통해 어리석은 군주를 내쫓을 수 있다는 역성 혁명론을 폈다. 또한 선양 제도를 통해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현명한 이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곧 다산은 왕도정치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그러한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군주를 위하여 신하는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다산이 생각한 왕도정치의 이상적 모델은 정조였다. 정조는 다산을 미래의 재상으로 생각하였고, 정약용은 정조를 고대 중국의 요순 임금과 같은 이상적 군주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를 품고 함께 백성을 위한 나라 만들기에 헌신했다.

김준혁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하지만 이들의 꿈은 정조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문화의 시대, 변화의 시대가 끝난 것이다. 풍운지회의 꿈은 사라졌다. 훗날 다산은 자찬묘지명을 쓰며 마지막 구절에 자신과 정조의 특별한 관계를 시로 남겨 놓았다. 그 시는 읽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찌른다.

“임금의 총애를 한몸에 안고는/ 궁궐의 가장 은밀한 곳에서 모셨으니/ 정말로 임금의 복심이 되어/ 아침저녁 참으로 가까이 섬겼다/ 하늘의 총애 입어/ 소박하지만 정성된 마음이 열리었네/ 육경을 정연하여/ 미묘한 이치를 깨치고 통했도다/ 소인이 해성 해치니/ 하늘이 어를 옥성시켰네/ 거두어 간직하고/ 장차 훨훨 노니련다.”

김준혁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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