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8.28 19:13
수정 : 2012.08.28 19:13
|
박범신 작가·상명대 석좌교수
|
아리스토텔레스 왈 “행복은 자족 속에 있다”고 했다. 동감이다. 흔히 지금보다 환경이 나아지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물질적 환경’이란 자본에 의한 것이므로 계속해서 더, 더 많은 물질적 환경에의 욕망을 불러오기 마련이므로 그것만으로 ‘자족’을 얻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자기 위로가 아닌 진정한 ‘자족’이란 어디서 얻는 것인가.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자만이 행복을 얻는다”는 플라톤의 말도 음미해볼 만하고, “인간의 최대 행복은 날마다 덕에 대해 말을 주고받는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잠언도 가슴에 닿는다. 무망지복(毋望之福)이란 말이 있는데, 바라지 않았으나 홀연히 찾아오는 복이라 해서 로또 당첨이나 뭐, 그런 것만을 가리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요컨대, 행복이란, 자족이란 덕성이 뒷받침돼야 얻는다는 뜻일 게다. 여러 장경에도 이르기를 덕은 ‘큰 산’과 같다고 했으니, 덕이란 일종의 부동심(不動心)이라 하겠다. 누구나 성공을 할 수는 있지만 덕이 없는 자가 성공을 통해 ‘자족’을 얻기는 낙타를 타고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격이 될 터이다. 당연지사, ‘성공’보다 ‘자족’을 얻는 게 더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한 사람’은 거의 행복하게 태어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태산 같은 부동심인 덕은 닦아서 얼른 얻을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그래서일까, 소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세속적인 행복을 일찌감치 등지고 차라리 ‘위대한 길’을 얻는다. 예컨대, 간디, 테레사 수녀, 링컨, 이순신 같은 사람들이다. 테레사 수녀가 말년에 쓴 편지글 모음집을 보았는데 스스로 고백하기를 “내 안엔 어둠이 가득하다”며 “도대체 신께선 어디에 계시느냐”고 피맺힌 목소리로 묻고 있다. 성인으로 추앙받는 위대한 그이도 개인적으론 행복하지 못했다는 것의 반증이다. 그런 사람들은 개인적 삶의 전폭적인 희생으로 수많은 다른 이의 등불과 지도가 된다.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갈 수 있는 용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삶이다.
말인즉, 만약 우리가 어떡하든 행복할 수 없다면 ‘위대한 길’을 가면 된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수많은 보통사람인 우리에게 너무 가혹하다. 보통사람은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제3의 길은 공동체 룰에 따라서 성실히 일하고 소박하게 사랑하며 세상 속 ‘모범생’으로 사는 것이다. 때로 잠깐씩의 ‘자족’도 느낄 것이고, 찰나적인 ‘위대성’도 자기 안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완전한 행복, 완전한 위대성을 지속적으로 얻을 수는 없기 때문에 사회 안에서 대체적으로 ‘혼자 가되 함께 가고 함께 걷되 혼자 걷는’ 보편적 길을 선택한다. 그들이 모이면 ‘위대한 보통사람들’이 된다. 이른바 ‘모범시민’이다.
각설하고, 요즘 대통령선거 전초전을 시시각각 중계받으면서 느끼는 내 관전 포인트는 그들이 각각 행복한 사람, 위대한 사람, 모범생 중 어디에 속하느냐 하는 것이다. 행복하지도 위대하지도 않으며, 더구나 ‘모범생’도 아닌 지도자를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내가 겪은 대통령들은 대부분 센 자들이었다. ‘센 자’란 덕은 부족하지만 갖가지 정파 논리를 잘 활용하여 아군은 단단히 결집시키고 적은 강력히 제어해가는 세속적인 내공이 단단한 사람을 내 나름 소박하게 이르는 말이다. 수많은 정책은 나열되어 있으나 어찌된 노릇인지 실제 정치는 대부분 아군과 적군의 전선에 따른 지배력 경쟁에 모든 역량이 집중돼 있는 게 사실이다. 때로는 국민만 소외된 구경꾼으로 내몰린다. 아니, 구경꾼에 멈추지 않고 이제 ‘모범시민’의 길마저 팽개치고 많은 국민이 그들의 전략 전술을 낱낱이 벤치마킹하고 있는 형편이다. 저들이 저들 입맛대로 우리를 ‘꾼’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그런 전략과 전술은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개인적 고백이지만 난 더 이상 ‘센’ 대통령 싫다. 비가 오면 당신의 한쪽 어깨는 빗속으로 자연스럽게 내놓고 우산의 3분의 2를 우리에게로 슬쩍 밀어주는 ‘행복한 대통령’을 만나면 참 좋겠다. 행복한 대통령을 만나면 나도 자연 그를 닮고 싶어질 것이므로.
박범신 작가·상명대 석좌교수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