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9.18 19:24
수정 : 2012.09.18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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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작가·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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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논산으로 집필실을 옮긴 게 벌써 일 년 가깝다. 추석을 앞두고 두 개나 연달아 태풍이 휩쓸고 가 가슴이 아프다. 흙탕물에 잠겨 못쓰게 된 논도 있고 쑥대밭이 된 과일밭도 있다. 시골에 내려와 사니 서울 살 때 실감 못했던 농민들의 마음이 환히 짚인다. 그렇잖아도 세계화라는 ‘폭력적인 환경’ 때문에 앞날이 지난한 농촌인데 자꾸 태풍까지 불어닥쳐 귀한 일 년 농사를 휩쓸고 가는바, 다가오는 추석조차 무겁기 그지없다.
우리 집에 딸린 텃밭은 워낙 작아서 태풍 피해를 직접 본 건 없지만 그렇다고 수확이 실한 것도 아니다. 고구마는 우물 공사로 파헤쳐 거둘 게 없고, 콩은 제때 순을 따줘야 하는 걸 잘 몰라 열매가 거의 맺히지 않았으며, 잘 자라던 옥수수는 청설모 가족들이 내려와 밑동을 갉아 쓰러뜨려 잡숫는 바람에 남의 차지가 된 지 오래다. 그나마 나은 게 고추농사인데, 지난번 태풍 ‘볼라벤’ 때 서울에서 사나흘 있다 내려갔더니 모조리 떨어졌으니 이 가을, 거둘 게 없다. 아내가 하나라도 구할 요량으로 땅에 쑤셔 박혔던 상처투성이 고추를 정성껏 말리는 참에 이번엔 ‘산바’가 또 들이닥치고 만 것이다. 맨땅에 떨어져 다치고 파이고 썩은 자국투성이인 고추를 보고 있노라면 그것이 곧 농사를 망친 농민, 어민의 가슴이려니 해서 차마 바로 보기 어렵다.
그래도 우리에게 추석은 다가온다. 밤새워 차례상을 준비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적은 농토를 갖고 있었지만 장꾼으로 떠돌던 아버지 대신 평생 농사를 지어야 했기 때문에 어머니야말로 정작 흙투성이 농사꾼이라고 불러야 맞다. 태풍 등으로 쌀농사를 망친 경우엔 햅쌀을 구해 와야 한다며 장장 이십 리 길, 강경 장까지 먼 걸음을 했던 어머니가 잊히지 않는다. 햇것들로 정성껏 음식을 빚는 어머니의 손길은 이제 생각하면 하늘에 닿고 있었을 것이다. 모든 걸 하늘이 내려준다는 걸 알고 있는 손이기 때문이다. 농작물을 오로지 경제적 가치로만 환산하는 버릇에 길들여진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이로운 교섭이 이루어지는 손이다. 그 손엔 자연과 교접하면서 얻어내는 순정한 경이로움이 깃들어 있고, 세계는 물론 죽은 자들과도 함께 맺어지고자 하는 우주적 겸손이 깃들어 있을 뿐 아니라, 만물이 저 홀로 유아독존, 우연히 존재할 수 없다는 깊은 철학적 인식도 깃들어 있다.
몽테뉴의 이런 말이 떠오른다. “나는 농민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비뚤어진 판단을 내릴 만큼 학문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몽테뉴는 오늘날과 같은 기민한 세계화의 물결을 다 내다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어떻게 지구 반대편에서 잡히는 생선들 때문에 극동의 작은 나라 어민이 시름에 빠지기도 하는 세계화의 폭력적 속도를 알 것이며, 그가 어떻게 캘리포니아에서 생산되는 쌀 때문에 고요한 아침의 나라 농민들이 삶을 송두리째 위협받을 수 있는 세계화의 분별없는 욕망을 알았겠는가.
시골에 와서 내가 직접적으로 보고 느끼는 것은, 보편적 삶에 미치는 정(政), 관(官)의 위세가 여전히 매우 강력하며 거의 결정적이라는 사실이다. 민주화라는 이름 위에 무소불위의 자본이 보태져 더욱 정교해진 프로그램이 작동중이라서, 그걸 전위적으로 실천하는 관의 위세는 당연히 강력해질 수밖에 없다. 서울에 있을 때 실감하지 못했던 사실이다. 국회의사당, 청와대에서 먼 시골에 와서 오히려 ‘정치’의 중요함을 나날이 깨닫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농민이 아무리 ‘비뚤어지지 않은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해도, 정치인 한두 사람이 ‘비뚤어진 판단’을 하면 태풍에 의해 그렇듯, 우리네 ‘일년 농사’ 하루아침에 헛것이 되고 만다. 추석 차례상에 만국의 생물이 오르는 시대에 사는 건 위태롭고 불안하기 그지없다. 몽테뉴의 말은 틀린 말이다. 이제 농민도 자본주의 세계화를 배우는 ‘학문’은 물론이고, 눈 부릅뜨고 ‘정치’도 해야 한다. 그래야 내 ‘농사’를 지키는 세상이다.
박범신 작가·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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