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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 소녀 살인 사건’의 가해자로 기소됐던 10대 청소년들이 지난 2010년 8월, 사건 변론을 맡았던 박준영 변호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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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의 재구성 - 노숙소녀 살인사건] ③ 반전
아버지·새엄마에 얻어맞던 소녀수원역 노숙인들 틈에서 살기도
난데없이 수원지검에 불려갔더니
노숙소녀 상해치사 혐의로 구속
검사 “네 남자친구가 자백했어” 독방엔 한기가 돌았다. “텔∼미, 텔∼미.” 이따금 누군가 최신가요를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궁상스런 노랫소리가 울려퍼지면 옆방 재소자들이 발작적인 신경질을 냈다. 2008년 1월 경기도 수원구치소엔 볕 한 점 들지 않았다. 한정임(가명·당시 17살)양의 통통한 뺨에 거친 각질이 허옇게 일곤 했다. 독방에 얼마를 갇혀 지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루가 까마득했다. 잿빛 벽을 보며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다. 구치소에서 벗어나는 꿈을 꾸다 잠에서 깨면 눈물로 베갯잇이 흥건했다. “정말 안 죽였어요.” 범행을 부인할 때마다 검사는 한양을 독방으로 보냈다. 수원지검 본청 별관 조사실로 끌려온 것은 2008년 1월23일이었다. 몇달 전, 한양은 거리에 주차된 차에서 돈을 훔쳤다. “그땐 배가 많이 고팠다”고 한양은 나중에 말했다. 한양은 가출 청소년이었다. 친엄마는 한양이 5살 때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용달차를 타고 가족 나들이를 갔다가 사고를 당했다. 살림은 망가졌다. 새어머니는 한양에게 모질었다. 한양은 종종 얻어맞았다. 새어머니는 교복 사줄 돈이 없다고 했다. 한양은 중학교 졸업을 포기했다. 술취한 아버지는 “널 보면 네 엄마가 생각난다”며 한양을 때렸다. 3살 아래 동생에게 밥상 차려주는 일도 지긋지긋했다. 12살 소녀는 집을 나와 버렸다. 수원역 앞 광장에는 100여명의 노숙인들이 있었다. 그들 틈에 섞여 들어간 한양은 대합실 의자에 쪼그려 잤다. 새벽이면 근처 교회에서 공짜 밥을 먹었다. 추운 날엔 청소년 쉼터의 문을 두드렸다. 식당 전단지 돌리는 일로 푼돈을 벌었다. 구걸도 했다. 돈이 생기면 찜질방에 갔다. 처지 비슷한 또래들과 어울려 초등학생들에게 ‘삥’(갈취)을 뜯거나 빈 차를 털기도 했다. 그러다 붙잡혀 절도죄로 보호처분을 받았다. 보호처분 규정을 어기고 또다시 가출해 안양에 있는 소년분류심사원에 들어갔다. ‘뭔가 하나 터졌구나.’ 소년분류심사원에 있다가 난데없이 수원지검에 불려가면서 한양은 옛 잘못 가운데 하나가 들통난 것이라 생각했다. 소녀의 짐작은 틀렸다. 죄목은 따로 있었다. ‘상해치사’였다. 검찰은 2007년 5월14일 수원고등학교에서 발생한 ‘노숙소녀 살인사건’의 진범으로 한양을 구속했다. 이미 7개월 전 20대 노숙인 2명이 범인으로 구속됐고, 그 가운데 1명은 실형을 살고 있는 상태였다. 노숙소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노숙자에서 가출 청소년으로 돌변해 가는 한복판에 자신이 서 있다는 사실을 한양은 잘 몰랐다. 그 사건을 알고는 있었다. 함께 어울리던 20대 노숙인 아저씨들이 10대 소녀를 죽였다고 하여 한양도 놀랐다. 당시 한양과 친구들은 폐회로텔레비전(CCTV) 영상을 확인하려고 수원역에 나온 형사들을 도와주기도 했다. “친구들 모두 자백했어. 네 남자친구 차승진(가명·당시 19살)이가 ‘너랑 같이 (살인)했다’고 다 이야기했다고.” 한양은 검사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친구들이 같은 죄목으로 붙잡혀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도 믿을 수 없었다. 우리가 사람을 죽였다고? 살뜰히 믿고 따랐던 남자친구가 나를 지목했다고? 갑갑한 가슴을 치며 소녀는 극단적인 생각도 했다. “차라리 창밖으로 뛰어내리거나, 제 목을 그어버리고 싶었어요.” 한양은 나중에 말했다. 검사는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를 설명해줬다. “변호사 사줄 가족은 있어?” 검사가 물었다. 가출해 지내는 처지라는 걸 검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빠가 떠올랐다. 날품 일감마저 끊겨 벌이가 없는 터였다. 말썽쟁이 딸을 위해 변호사를 불러줄 것 같지 않았다. “아빠가 (변호사 선임을) 해주실지 안 해주실지….” 한양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지금 당장 변호사 선임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검사는 말했다. “그냥 (혼자) 할래요.” 그 대답이 초래할 사태를 당시에는 잘 몰랐다. 자신을 살인범으로 기소하려는 검찰에 혼자 힘으로 맞서겠다고 답했을 때, 한양은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17살 소녀였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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