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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8.29 18:56 수정 : 2012.08.29 21:39

‘노숙소녀 살인사건’ 피의자로 몰린 10대 청소년들이 2008년 1월29일 경기도 수원시 수원역에서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사진 법무법인 경기 박준영 변호사 제공

무죄의 재구성
노숙소녀 살인사건 ④조작

변호사·가족 없는 검찰 조사실
알리바이 있다는 말 무시하고
무조건 “자백만이 유일한 길”
부인하던 모습은 녹화도 안해
진술·현장검증까지 직접 지도

소년은 잔뜩 몸을 웅크렸다. 한기가 들었다. 왜소한 몸에 걸친 커다란 점퍼를 여몄다. 2008년 1월17일 밤 9시 권영민(가명·당시 17살)군은 경기도 수원지검 영상녹화실에 앉았다. 지난 두 시간이 꿈만 같았다. “억울하다”고 얼마나 소리쳤는지 모른다. 눈물도 흘렸다. 모두 소용없는 짓이 돼버렸다.

그날 저녁 7시께 권군은 영문도 모른 채 잡혀 왔다. 검사는 난데없는 말을 했다. “네가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 범인이지?” 황당한 소리였다. 종종 수원역에 놀러 간 건 사실이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난 2007년 5월 권군은 수원이 아니라 성남에 있었다. 여자친구와 함께 지냈을 때라 또렷이 기억났다.

권군은 검사의 허락을 받아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 나 기억 안 나는데 작년에 내가 무슨 잘못을 했대. 여기 검찰청이야.” 울먹이는 손자에게 할머니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할머니가 거기 길을 모르는데…. 어쩔까, 아가.”

술고래 아버지와 몰인정한 새어머니를 피해 가출한 지 몇 달 동안 운 적은 없었다. 남자니까 힘들어도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권군은 소리내어 울었다. “차라리 거짓말탐지기라도 시켜주세요. 저 정말 결백해요.” 그런 권군에게 검사는 “연기를 잘한다”고 비꼬아 말했다.

이미 4명의 다른 친구들이 자백했다고 검사는 을렀다. “그런데 너만 억울하다고 하면 불리해지겠어, 유리해지겠어?” 함께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이 자신을 모함하는 이유를 권군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검사의 말이 사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권군은 나중에야 알게 됐다. 권군이 검사 앞에 앉아 있던 그때까지, 다른 친구들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 검찰 조사를 마친 상태였다. 수원지검 마약조직범죄수사부가 “사건의 진짜 범인은 수원역의 10대 노숙 청소년”이라는 단순 제보만으로 수사에 착수했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게 됐다.

“자백만이 유일한 길이다. 네가 죄가 없다고 해도 믿어줄 사람 없다.” 검사의 목소리는 시종 부드러웠다. 하지만 살인이라니, 감방에 오래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반항하려고 집 나와서 벌 받는구나.’ 17살 소년은 그렇게 자신을 책망했다.

검사는 설득에도 능했다. “칼 들고 싸움 벌여 사람 죽인 조폭 중에 집행유예로 나온 사람도 있어. 너네는 미성년자잖아. 법정형도 훨씬 더 낮아.” 법을 잘 모르는 권군도 ‘집행유예’가 뭔지는 알았다. 그것은 감옥을 가지 않아도 되는 처벌이다.

자백과 번복을 오가던 권군은 결국 ‘완전한 자백’을 선택했다. 변호사도 가족도 없이 혼자 앉은 검찰청 조사실에서 나머지 4명의 10대 청소년들도 모두 자백했다. 검사는 이 중 한 소녀(당시 18살)에게, 함께 붙잡혀온 세 살 아래 소녀를 “좀 설득해보라”고도 했다. 나중에 만난 아이들은 “그땐 그것(자백)이 최선의 방법이고 하루빨리 집에 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범행을 완전히 인정하는 자백을 받아낸 뒤, 검사는 아이들을 영상녹화실로 데려갔다. 나중에 검찰은 이 영상녹화 사실을 홍보했다. “사안이 중대한 점을 감안해 조사 과정을 모두 영상 녹음·녹화하는 등 적법절차를 준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훗날 법정 증언 등을 통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두서없이 진술한 대목은 법정에 제출된 녹취록에서 삭제되거나 윤색됐다. 하지 않은 일을 설명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검사는 앞서 조사받은 아이들의 진술내용을 읽어주며 진술의 아귀를 맞췄다.

그 결과, 법정에 증거로 제출된 최종 녹취록에서 아이들은 망설임 없이 범행을 자백하고 있었다. 녹취록을 살펴본 1심 판사는 유죄를 선고했다. 현장검증에서도 아이들은 수사관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요렇게? 그렇게 톡 치지는 않았잖아. 주먹 쥐고(해야지).” 수사관은 동선까지 꼼꼼히 일러줬다고 아이들은 나중에 털어놓았다.

현장검증 자리에서야 아이들은 마스크를 쓴 친구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땐 그저 오랜만에 서로 만난 게 반가웠어요.” 자신들이 빨려들어가고 있는 구렁텅이가 무엇인지 아이들은 여전히 알지 못했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무죄의 재구성] 노숙소녀 살인사건

① [자백] 지적 장애 나씨, 감방생활이 두려워 송씨를 지목하다


② [회유] “나가게 해줄게” 형사의 구슬림에 넘어갔다


③ [반전] 처음엔 노숙인의 범행이라더니, 이제는 가출 10대가 ‘진범’이라고…

⑤ ‘호소’에서는 범인으로 몰린 청소년들이 청소년보호시설의 상담교사 및 국선변호사와 함께 무죄 판결을 받아내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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