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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8.30 20:56 수정 : 2012.08.31 11:18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무죄의 재구성
노숙소녀 살인사건 ⑤호소

구속 소녀가 기댈 곳은 상담교사뿐
“양아치처럼 살았지만 살인은 안해”
겨우 천원 빌려 산 편지지에 써보내
교사·변호사, 매일 증거자료 재검토
하지만 1심은 수사결과 믿고 “유죄”

처음엔 당혹스러웠다. 다음엔 배신감이 들었다. 경기도 청소년상담지원센터의 상담교사 김태진(당시 30살·여)씨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 아이가 사람을 죽였다니. 자신이 2년 가까이 돌봤던 10대 소녀가 ‘살인범’으로 검찰에 붙잡혔다는 소식을 김씨는 믿을 수 없었다.

2006년 김씨는 한정임(가명·당시 15살)양을 처음 만났다. 가출 청소년 상담 일을 막 시작했을 때였다. 한양은 수원역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쉼터에 들러 하룻밤 잠을 청하곤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집보다 거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소녀는 말했다. 소녀의 눈에 가득한 불신을 김씨는 보았다. 일단 마음을 연 뒤엔 강한 애착을 보였다. 스스럼없이 김씨를 “엄마 같은 분”이라고 말했다. “꼭 요리사 돼서 맛난 거 해드릴게요. 그때까지 돌봐주세요.”

2008년 1월, 검찰이 한양과 함께 기소한 3명의 가출 청소년들도 김씨가 잘 아는 아이들이었다. 그들이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의 범인이라고 언론은 보도했다. “청소년들이 고문에 가까운 잔인한 폭행을 했다”는 보도를 김씨는 보았다. 검찰이 작성한 보도자료를 그대로 옮겨 적은 것임은 나중에야 알았다.

편지를 받은 건, 한양이 수원구치소에 수감된 지 1달이 지난 2008년 2월이었다. “참 암울해요. 쌤(선생님)은 내가 정말 그랬다고 생각해요?” 한양에겐 돈이 없었다. 동료 수감자에게 1000원을 빌려 편지지를 샀다. 그 귀한 편지지에 자신의 결백을 빼곡히 적어, 한양은 김씨에게 보냈다.

“제가 아무리 가출해서 양아치처럼 살았지만 쌤만은 저희를 믿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살인) 안 했다고 난리쳐도 검사가 몰아붙여서, 난동 피우면 없던 죄도 생길까봐, 막장이다 생각하고 인정했어요. 선생님과 했던 약속 지키려고 애를 썼는데 설마 제가 사람을 죽였을까요?”

한양의 아버지는 면회조차 오지 않았다. 함께 기소된 다른 청소년들의 처지도 마찬가지였다. 돌보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국선변호사가 선임됐지만, 아이들은 변호사도 믿지 않았다. “국선변호사는 검사 편”이라는 옆방 성인 재소자들의 이야기를 믿었기 때문인 것을 상담교사 김씨는 나중에 알았다. 거리의 아이들이 신뢰한 사람은 ‘쌤’뿐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서둘러야 했다. 김씨는 국선변호사를 만났다. 아이들의 ‘거짓 자백’이 아닌 ‘진실한 고백’을 변호사에게 알렸다. 이후 1년여 동안, 김씨를 비롯한 상담센터 교사 4명과 국선변호인 박준영 변호사는 개인시간을 반납했다. 거의 매일 저녁 모여 수사 자료를 처음부터 다시 검토했다. 범행 장소인 수원역에서 수원고등학교까지 수십 차례 걸으며 살폈다. 검찰의 진술 녹화영상을 입수해 녹취록도 밤새 새로 썼다.

대가를 지불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편지지를 구할 1000원도 없이 감옥에 갇힌 아이들을 구하려고 동분서주하게 만든 힘이 어디에서 비롯했는지 그때는 따져볼 여유가 없었다. 자신들이 믿고 따랐던 ‘쌤’이 곁에 앉고 국선변호사가 마주 앉은 자리에서 아이들은 비로소 줄줄이 자백을 번복했다.

하늘도 그들을 돕는 듯했다. 이 사건의 범인으로 붙잡혀 복역하고 있던 노숙인 송인철(가명·당시 30살)씨가 2008년 4월 열린 1심 공판의 증인으로 나섰다. “꼬맹이들과 함께 소녀를 때렸다”는 송씨의 검찰 진술은 10대 노숙 청소년들을 기소하는 결정적 구실을 했다. 하지만 그날 법정에 선 송씨는 또박또박 말했다. “저도, 아이들도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박 변호사와 상담교사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환호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해 7월, 1심 재판부였던 수원지법은 한양을 비롯한 노숙 청소년 4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각각 징역 2~4년형을 선고받았다. “어린 피해자가 꿈을 피워 보지도 못한 채 차디찬 콘크리트바닥에서 생을 마감하였음에도, 피고인들이 끝까지 범행을 부인하는 점에 비춰 엄히 처벌함이 마땅하다”고 당시 재판부는 밝혔다. 아이들도, 교사들도, 모두 울음을 터뜨렸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무죄의 재구성] 노숙소녀 살인사건

① [자백] 지적 장애 나씨, 감방생활이 두려워 송씨를 지목하다


② [회유] “나가게 해줄게” 형사의 구슬림에 넘어갔다


③ [반전] 처음엔 노숙인의 범행이라더니, 이제는 가출 10대가 ‘진범’이라고…


④ [조작] 울면서 “결백” 외치자 검사 “너 연기 잘한다”

⑥ ‘증거’에서는 국선변호사와 상담센터 교사들이 새로 입수한 증거들로 검찰 기소 내용을 뒤집고 무죄를 입증하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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