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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9.05 20:33 수정 : 2012.09.06 15:01

[무죄의 재구성] 노숙소녀 살인사건 ⑨ 숙제

보호자 동석·영상녹화 등
임의규정·재량사항에 불과
신문조서도 대부분 윤색
영상녹화를 의무화하고
진술서 왜곡 막을 장치 필요

7명이 스스로 ‘살인범’이라고 털어놨다. 나중엔 그들 모두 자백을 뒤집었다. 이들은 법정에서 “(검사와 형사가) 무서워 거짓말했다”고 말했다. 여러 명의 피의자가 살인죄를 거짓 자백한 일은 전무후무하다.

“내가 죽였다”고 털어놓은 이들은 판단력이 떨어지는 20대 지적 장애인과 10대 청소년들이었다. 이들 모두 돌보는 이 없는 노숙인이기도 했다. 2007년 발생한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은 한국 형사사법체계의 허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약자를 보호하려는 작은 원칙들만 적용됐더라도 그들은 죄인으로 내몰리지 않았을 것이다.

믿을 만한 사람이 함께했다면
느닷없이 잡혀온 이들 곁엔 아무도 없었다. “변호사를 선임할 거냐”는 검사의 질문에 10대 청소년은 “그렇게 하고 싶지만 부모님이 해주실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검사는 “지금 당장 결정해야 한다”고 닦달했고, 17살 소녀는 혼자 신문에 응했다. 이런 상황은 경찰에 잡혀온 20대 노숙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형사소송법 244조 5항은 “특별히 보호를 필요로 하는 자의 경우 (조사 때) 신뢰관계에 있는 자를 동석케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강제력 없는 임의규정일 뿐이다. 현실에선 변호사를 고용할 여력이 되는 사람만 검사 또는 형사 앞에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다. 이 사건을 담당했던 변호사 박준영(38)씨는 “피의자 인권도 중요한 만큼, 청소년들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선 이들이 믿을 수 있는 공적 기관의 상담원들이 동석하게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10대의 곁에 부모 또는 상담교사가, 지적 장애 노숙인 곁에 상담전문가가 함께 있었다면 사태는 달라졌을 것이다.

진술 전체 영상녹화 의무화해야
10대 청소년들은 처음에 몇 시간씩 범행을 부인했다. “다른 친구들도 모두 자백했으니 소용없다”는 검사의 압박에 비로소 거짓 자백을 했다. 검사는 일단 범행을 확실히 인정하도록 한 뒤에야 영상녹화실로 청소년들을 데려갔다.

형사소송법 244조 2항은 영상녹화를 재량사항으로 규정하고 있다. 중범죄가 아니면 영상녹화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번 사건의 경우, 뒤늦게 국선변호사가 확보한 영상이 무죄 확정판결을 받는 데 중요한 증거가 됐다. 자백을 머뭇거린 정황이 일부나마 영상에 담겼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모든 조사 과정을 영상에 담았다면 이들의 자백이 거짓이라는 사실이 더 빨리 밝혀졌을 것이다.

진술한 그대로 조서를 작성했다면
이 사건의 진술녹화 영상에서 청소년들은 알지 못하는 범행을 자백하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수원지검의 이아무개 수사관은 첫 신문부터 현장검증까지 범행 현장과 수법에 관련된 내용을 자세히 알려줬다. 다른 청소년의 진술 내용을 보여주며 같은 진술을 유도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진술조서를 중요한 근거로 삼아 판결을 내린다. 중요한 진술을 지우거나 문답을 바꿔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범행 수법을 자백한 것처럼 꾸민 조서는 진실을 왜곡할 수밖에 없다. 박준영 변호사는 “조서에 피의자의 진술을 모두 담긴 어렵더라도 진술 취지는 왜곡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이들과 노숙인들이 말한 그대로의 뜻을 담아 조서가 작성됐다면 재판부가 유죄를 판결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사건의 초동수사를 맡은 수원남부경찰서 강력6팀 염규호 형사는 사건 당일 수원역의 무인카메라 영상을 확인하고도 이 사실을 사건기록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수사 단계에서 누락된 증거는 재판부의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을 맡아 10대 청소년들을 구속 기소하고, 기소 단계에서 이들을 파렴치범으로 모는 보도자료를 냈던 담당 검사도 마찬가지다. 수원지검 마약조직범죄수사부에서 이 사건을 수사했던 ㅈ법무법인의 박재형 변호사는 청소년들을 기소하면서 “가출 청소년들은 성매매와 윤락으로 용돈을 마련하고 범죄가 일상화돼 있다”며 근거도 없는 내용까지 언론에 홍보했다.

사건을 수사한 검경 관계자들은 잘못된 수사로 피해를 본 이들에게 사과하거나 재발 방지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무죄 판결을 이끌어낸 박준영 변호사는 기사가 나간 뒤 말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보도가 있었지만 공권력에 저항할 수 없었던 이들의 상황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 부당함이 글로 남겨져 세상에 알려진다니, 오늘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항할 수 없었던 이들을 누군가 밟고 지나갔다. 밟힌 이들의 목소리는 미약했다. 자신들이 밟은 것이 인간이었음을 언젠가 그들은 기억할 수 있을까.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끝>

[무죄의 재구성] 노숙소녀 살인사건

 ① [자백] 지적 장애 나씨, 감방생활이 두려워 송씨를 지목하다

 ② [회유] “나가게 해줄게” 형사의 구슬림에 넘어갔다

 ③ [반전] 처음엔 노숙인의 범행이라더니, 이제는 가출 10대가 ‘진범’이라고…

 ④ [조작] 울면서 “결백” 외치자 검사 “너 연기 잘한다”

 ⑤ [호소] “쌤만은 저를 믿어주세요” 한통의 편지

 ⑥ [증거] “인철이도 아이들도 그 고등학교에 간 적 없다”

 ⑦ [원점] 경찰이 5년간 감춘 ‘무죄 증거’를 찾다

 ⑧ [상흔] 누명씌워 7명의 삶 뒤흔든 이들은 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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