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7.11 17:57
수정 : 2012.08.29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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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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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이대리의 직장생태보고서
젊은층과 직장인들에게 인기있는 에너지음료, 더 놀고 더 일하라고 채찍질하는 노동음료였네
고단한 일과가 끝나가는 오후 6시 무렵, 강 부장의 일성이 사무실을 가른다. “오늘 별일 없는 사람들 소주나 한잔 하지?”
정말 별일 없는 사람, 별일 있지만 없앤 사람, 별일 있었으면 하는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팀원이 다 모인 회식 자리로 변신 완료!
삼겹살집의 연기는 각자의 땀과 어우러져 지독한 체취를 쌓아간다. 취기가 오를수록 발언권은 강 부장에게 집중되고 허심탄회한 소통 취지는 안드로메다로 간다.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며 상모돌리기를 하던 박 과장은 이 대리에게 떠넘겨진 건배사에 깜짝 놀라 깨어나며 “위하여!”를 함께 외친다.
우리는 노동의 고단함을 달래기 위해 회식을 하고 술을 마시며 노래방 마이크를 잡는다. 술은 ‘노동음료’이며 노래방에서 부르는 노래는 ‘노동요’나 다름없다. 전날 과음으로 컨디션이 저하된 출근길, 나는 편의점에 들러 ‘또하나의 노동음료’인 에너지드링크를 집어든다. 에너지드링크는 ‘밥값을 하겠다’는 알량한 의지를 샘솟게 해줌과 동시에 경쟁사회 속에서 나의 추락을 막아주는 안전망처럼 느껴진다.
청년들에게 에너지드링크는 ‘원소스 멀티유스’ 노동음료다. 한주 내내 도서관에서 스펙과 씨름하며 에너지드링크를 들이켠 그들은 홍대나 강남의 클럽으로 향한다. 그곳에서도 에너지음료와 특정 주류를 섞어 만원 안팎에 파는 ‘밤’(Bomb)이라는 이름의 또다른 ‘노동음료’를 마신다. 이들에게 디제이가 믹스한 클럽음악은 또하나의 ‘노동요’다. 떼를 이루어 추는 셔플댄스를 보노라면 일손을 다그치던 ‘농악무’가 떠오른다. 새로운 한주의 각오를 다지기 위해 그들은 아마 월요일 아침 또하나의 에너지드링크를 마실 것이다.
‘고된 노동-음주-에너지드링크’로 이어지는 사회 각층의 의무방어전들은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그로 인해 쌓인 피로는 에너지드링크와 커피에 의존해 해결한다. 얼마 전 편의점 업계는 에너지드링크 시장이 커피와 맞먹을 정도로 급성장했다고 발표했다.
우리나라에 앞서 에너지드링크가 정착한 외국의 광고물들을 보면 ‘활기차고 신나게 놀기 위해 마신다’는 일관된 콘셉트를 가지고 있다. 이 묘한 제품은 한국에 들어와서 한국 사회 특성에 맞게 ‘열심히 일하기 위해 마신다’는 콘셉트로 자연스럽게 현지화된 듯하다.
우리는 아직도 “할 수 있다”는 구호를 외친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는 <피로사회>라는 책에서 “할 수 있다”류의 긍정이 넘치는 사회에서 낙오된 사람들이 파괴적 자책과 자학에 직면한다고 지적한다. 쉽게 풀어보면 “너무 뺑이치지 마세요.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서 달릴 힘은 챙겨두세요” 정도가 아닐까?
얼마 전 페이스북 친구 중 한명이 클럽에서 ‘밤’을 마시는 사진을 올리며 “불금! 내일 아침까지 미친듯이 흔들려면 Bomb, Bomb, Bomb!”이라는 글을 덧붙였다. 그 아래에 달린 통찰력 넘치는 덧글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당신은 ‘밤’으로 월요일 체력을 대출하고 계십니다.” 에너지드링크란 놈은 피로사회뿐만 아니라 ‘빚 권하는 사회’의 단편까지 온몸으로 표현한 문화인류학적 음료였던 것이다!
H기업 이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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