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8.15 19:30
수정 : 2012.08.29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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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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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이대리의 직장생태보고서
업무시간 발목 잡는 익명의 홍보·마케팅 메시지들…응대할수록 쌓이는 건 피로와 짜증뿐
공포의 실체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영화 <연가시>를 보다가 느낀 점. 감염된 가족들을 살리기 위한 주인공의 모습이 허상과 싸우는 직장인들의 일상 속 한 부분과 닮아 있다.
매일 수백명의 ‘김미영 팀장’들로부터 날아드는 문자메시지, 메시지, 전화통화에 맞서는 모습들이 그것이다. 업무시간 중 불쑥불쑥 걸려오는 이동통신사, 보험사, 카드사 전화들, 그리고 대출을 종용하는 문자메시지까지, 그것들에 맞서 싸우는 우리도 ‘생활전사’다. 하루 중 두어번 올까 말까 한 생산성 최고조 시점에 마주친 그것들이 우리 같은 직장인들에게는 연가시다. 간혹 내공 높은 연가시의 언변에 제대로 걸려 본의 아니게 오랜 통화를 마친 우리의 모습은 영양분을 흡수당한 3단계 감염자의 쭈글쭈글한 모습과 비슷하다.
구속된 ‘김미영 팀장’을 대신해 새로 나타난 연가시들과 우리들이 ‘생산성 쟁탈’을 주제로 벌이는 제로섬 게임은 어떻게 본격화된 건지 주변의 전언들을 기초로 가설을 세워본다.
첫째, 탐욕설. 각종 할인쿠폰과 놀이공원 무료입장, (해적판) 파일다운로드 권한 등에 홀려 팔아넘긴 개인정보가 숙주가 됐다는 주장이다. ‘현대 사회에서 제값 주고 사면 바보’를 외치는 옆자리 최 대리는 “쉽게 적어 넘긴 개인정보가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편인데 어느 순간 마구 걸려오는 전화와 스팸문자가 임계점을 넘어서 한계를 느낀다”고 말했다. 일리 있다.
둘째, ‘카피레프트’설. 수천만명의 개인정보를 해킹당한 온라인쇼핑몰과 포털사이트의 사례, 심지어 이동통신사까지 고객정보를 털린 사실이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이쯤 되면 “모든 정보는 제한 없이 공유되어야 한다”는 카피레프트운동가들의 본거지가 해당 기업들이 아닌지 의심될 정도다. 조금만 더 발전한다면 ‘제2의 냅스터’가 탄생하고 지구촌 모두가 서로의 숟가락 수까지 꿸 정도로 절친이 되는 일도 어렵지 않아 보인다.
셋째, ‘몰랐었어~’설. 거기 왜 내 개인정보가 있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경우다. 초여름을 후끈 달군 바 있는 ‘개인비리’ 차원의 ‘당원 명부 매매사건’을 예로 들 수 있겠다. 해당 정당과 전혀 다른 정치적 성향을 가진 기획팀 정 과장은 “휴대전화 교체 시기나 필요로 하는 보험의 종류, 대출이 필요할 때를 정확히 알고 접근하는 연가시들과 달리 전혀 정치적 성향이 다른 내게 ‘선거 영업’을 한 그것들은 변종임이 분명했다”며 “나도 모르는 사이 그 정당의 당원으로 등록된 것으로 추측되어 ‘멘붕’ 상태가 됐는데, 분노보다는 내 멘탈을 노년층으로 오인받을까봐 두려웠다”고 전했다.
이처럼 연가시들은 그들만의 생산성을 위해 사회를 좀먹고 있다. 이 지긋지긋한 악순환을 종식시키는 개인이나 단체에는 기업의 생산성 향상과 근로자들의 정신건강 증진, 전파의 공공성 증진 등에 기여한 것을 이유로 훈장을 수여해야 하지 않을까? 설득과 협상의 달인임이 증명된 만큼 양지로 끌어내 차세대 전투기 도입 등 강대국들과의 협상 현장에 활용해 보는 것도 좋을 것으로 예상된다. 적어도 ‘굴욕’은 없을 것 같다는 믿음이 드는 건 왜일까?
H기업 이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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