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9.12 23:56
수정 : 2012.09.16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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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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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이대리의 직장생태보고서
창의성 외치면서도 관행 앞에서 무릎꿇는 대한민국 기업문화
한국의 기업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채용 시 지원자들에게 가장 많이 요구되는 덕목 중 하나는 ‘창의성’일 것이다. 그럼에도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다수 기업들이 가장 갈급해하는 것 중 하나도 ‘창의성’일 것이다. 도대체 창의성은 왜 ‘가질 수 없는 너’가 된 것일까?
갓 대학을 졸업하고 현업에 배치된 ㄱ사원의 눈은 출근 준비를 하면서부터 반짝인다. 오늘도 선배들에게 큰 소리로 인사를 하며 하루를 힘차게 열 것이며 빈자리에서 울리는 전화를 가장 빨리, 그리고 예의 바르게 당겨 받는 임무를 수행할 마음가짐도 다잡는다.
출근을 시작한 지 한달째 되는 오늘, ㄱ사원은 드디어 ‘사람구실’을 시작할 정식 업무를 부여받았다. 비록 선배사원의 조수 역할이지만 이번 기획서 작성에 대학에서 배운 모든 것을 쏟아부을 각오를 다진다. 야근을 위한 체력비축 상태도 완벽하다. 새로운 마케팅 전략 보고서 작성을 위해 주어진 시간은 2개월. ㄱ과 선배가 고민을 거듭해 1개월간 만든 초안을 팀장에게 보고하자 “레이아웃을 조정해라. 전술적 측면을 보완하라”와 같은 주문이 돌아왔다. 며칠 뒤 재보고에서는 ‘사장님의 취향’도 반영해 몇가지 용어와 색상을 고쳤다. 파워포인트 파일은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며 ‘최종’, ‘최최종’, ‘최최종-1번’과 같은 번호가 붙어간다.
보고 일정이 다가올수록 ㄱ과 선배의 스트레스 수치는 급상승 일로에 놓였다. 발표 일주일을 앞두고 어느 정도 만족한 팀장이 ‘최최종-13번’ 파일을 임원에게 보고하자 “음, 괜찮긴 한데, 작년 보고서 한번 들고 와 봐”라는 반응이 돌아온다. ㄱ과 선배는 며칠을 더 투자해 수정 작업에 몰입한다. ‘상급자 니즈의 결정체인 ‘최최종-14번’ 파일만은 수정하지 않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생각은 단 몇분 만에 비 오는 날 광장시장 빈대떡처럼 발라당 뒤집어진다. 임원이 “아, 괜찮긴 한데, ㅅ그룹 최근 보고서 좀 입수해서 벤치마킹해 보자”는 말을 내뱉으면서 말이다. 그렇다. ㄱ과 선배는 간과하고 있었다. 기업에서 ‘창의성’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빈도만큼 ‘벤치마킹’ 역시 상위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었던 것을 말이다. 디데이를 앞둔 3일간 굴지의 ㅅ그룹 보고서 샘플을 입수한 ㄱ과 선배는 죽을힘을 다해 보고서를 완성했고 결국 오케이 사인을 받기에 이르렀다. 프레젠테이션까지 무사히 마치고 실행 단계만을 앞뒀지만 담당자인 ㄱ과 선배는 헛헛한 속을 소주로 달랜 뒤 이튿날 데이터베이스(DB)에 축적된 모든 마케팅 보고서를 펼쳤다. 그것들은 놀랍게도 아주 많이 닮아 있었고 ㄱ과 선배는 ‘또 하나의 사골탕’을 만들어 냈다는 자괴감에 온몸을 떨었다.
‘사골탕 제조’의 첫 경험을 치른 지 3년이 지나 대리로 진급한 ㄱ은 그동안 몇가지 철칙을 세웠고, 그는 그 철칙 안에서 ‘안빈낙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 철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관행’은 인문학적 사고와 창조적 파괴보다 우위에 있다. 둘째, 아무리 긴 시간을 주는 보고서일지라도 절대 마감 3일 전까지 무사통과되는 법은 없다. 질기게 버티고 마지막에 제출하라. 셋째, ‘벤치마킹’과 ‘창의성’이라는 단어는 샴쌍둥이다. 그것들을 별개로 생각하지 말라.
경쟁이 숙명인 기업에서 이기려면 바꿔야 한다는 것은 진리다. 그런데 매번 ‘사골탕’을 만들어 내며 어떻게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 걸까?
오늘도 우리 주위에는 어디서 본 음료, 익숙한 휴대용 통신기기, 언젠가 읽어봤던 것 같은 글들이 자꾸 나타나고 있다. 복사본이 늘어감과 동시에 부끄러움은 반비례하며 줄어들고 있다.
H기업 이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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