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0.31 18:42
수정 : 2012.10.3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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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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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이대리의 직장생태보고서
결혼 2년차 쏟아지는 ‘좋은 소식’ 문의에 대처하는 이 대리의 자세
결혼 2년차 이 대리는 “좋은 소식 없냐?”는 질문에 익숙해졌다. 질문에는 안부의 의미를 넘어 일종의 채근과 생물학적 기능에 대한 약간의 의심이 조물조물 버무려져 있다.
이 대리와 아내는 대기업 집단으로 분류되는 곳에서 맞벌이를 한다. 그들은 부모의 지원은 받지 않고 각자 모은 얼마간의 돈을 보태 결혼 준비를 했다. 서울의 방 2개짜리 역세권 지상층 다세대주택 전세를 얻기 위해 은행 대출을 받은 그들에게 지상과제는 ‘빚 빨리 갚기’다. 결혼 전 갖고 있던 차도 팔아버리고 계획대로 빚을 갚아가며 즐거운 신혼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임신과 출산을 당장 실천에 옮긴다고 가정하면 현실은 암담해진다.
외벌이만으로 도시근로자 평균소득을 웃돌기 때문에 공공주택 곁에 얼씬거릴 자격도 없고, 출산 후 복귀를 반기지 않는 아내의 직장도 마음에 걸린다. 둘 다 직장생활을 계속한다고 가정했을 때 한동안 아이를 떠맡게 될 부모님이나 장인, 장모님은 ‘전생에 업보를 콤보로 짊어지신 걸까?’라는 생각도 든다.
잽싸게 ‘좋은 소식’을 전하지 못하는 이유도 알고 있다. 왜 하필 비싼 역세권에 집을 얻었는지, 일주일에 한두번 값비싼 에일(ale)맥주를 사다 마시는 취미를 버리지 못하는지, 남들 놀러 다닐 때 눈 질끈 감고 참지 못하는지 따위의 소소하고 일견 사치스러워 보이는 이유들 말이다. 그 돈 아끼면 ‘좋은 소식’을 향한 숨통은 더 빨리 틜 수 있다.
경기도권으로 눈을 돌려 집을 구하고 에일맥주는 쌉쌀한 ‘소맥’으로 대체하며 여름 바캉스를 한강 시민공원 수영장으로 대체하는 등 각고의(?) 희생을 실천한다면 ‘임신과 출산의 꿈’은 좀더 현실성 있게 다가온다. 하지만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에 대한 답은 아직까지 명쾌하지 않다. “아예 애 가질 생각이 없지 않다면 고생스럽더라도 일찍 가져라”라는 ‘선행학습형’ 조언에서부터 “애가 대학 가서 군대 갈 때쯤 네 자리를 회사에서 보전해줄 수 있을까?”라는 ‘장학퀴즈형’ 조언에 이르기까지 훈수는 홍수를 이루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출산율 저하와 세수 감소를 연결지어 걱정하는 국가의 태도는 그들의 머리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언론보도를 통해 조세정의를 무자비하게 짓밟는 사례들을 접하며 ‘유리지갑’ 한 쌍은 터지는 복장을 부여잡기 바쁜데, 태어날 아이가 ‘유리지갑 2.0’이 된다는 상상은 몸서리쳐진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좋은 소식 없냐?”는 유의 질문에 꾸준히 답해오며 성장해왔다. “반에서 몇 등 하고 있니?” “대학은 어딜 들어갔니?” “4학년인데 취업은?” “사귀는 사람은 있니?” “국수 언제 먹여줄 거야?”와 같은 다양한 질문에 서운치 않은 대답을 해왔기에 알만한 직장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 대리 부부는 “행복하기 위해 결혼했다”는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목표지향점을 갖고 있다. 아이를 좋아하지만 아이가 없는 지금도 행복하다. 만약 영영 자식 없이 살아도 별로 불행해질 것 같지 않다. 그런데 당장 아이를 갖는다면 몇 가지 ‘행복 위해요소’를 감수해야 한다.
우리는 결연한 강철대오로 출산파업에 임하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엉겁결에 출산파업의 현장에 떠밀려왔을 뿐이다. 소소한 삶의 행복만 지켜진다면 언제든지 기분 좋게 생산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다.
H기업 이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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