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2.12.12 17:48 수정 : 2012.12.13 14:55

[매거진 esc] 이대리의 직장생태보고서

연말 기업 임원인사를 보면서 느껴지는 추위와 괴리감의 정체

매년 이맘때 언론을 뒤덮는 이슈 중 하나는 대기업들의 임원 인사 소식일 것이다. 올해는 특히 여성이나 고졸 출신 임원에 대한 기사들이 눈에 띈다. 기업 내 ‘사회적 약자’로 분류될 수 있는 이들의 기쁜 소식은 함께 축하해줄 일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같은 조건을 가진 대다수가 아직 많은 불이익을 받고 있으며, ‘사회적 약자’가 아니더라도 엄동설한에 옷을 벗는 경우가 훨씬 많다.

“떠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왜 잘 드러나지 않을까요?”라는 질문에 대한 “그 사람들 홀가분하게 해주는 최소한의 배려”라는 인사팀 소속 선배의 대답은 그다지 배려심 많아 보이진 않는다.

남은 자, 지켜보는 자들이 각자 보고 싶은 것만 보며 자위하고 내면의 괴리감을 덜어내는 과정처럼 보인다면 너무 과장된 것일까?

이 겨울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있는 일본계 의류업체의 ‘히트댁(宅)’이라는 브랜드의 성공 비결은 이런 유의 괴리감을 적절히 제거했기 때문 아닐까? 냉정히 말해 ‘얇은 내복’인 이 제품은 발열소재와 기술력을 상징하는 영어 단어의 조합을 상품명으로 내세우고 있다. 생각해보면 오래전부터 ‘쫄쫄이 내복’은 있어왔지만, 따스함과 체면을 맞바꾸지 않던 패셔니스타들의 고집은 ‘내복’이라는 표현의 제거에서부터 허무할 정도로 쉽게 무너졌다. 요즘 ‘히트댁’을 즐겨 입는다는 멋쟁이 정 대리는 “이게 요즘 대세”라며 “예전엔 종아리 혈관이 터질 만큼 추워야 꺼내 입을까 말까 했던 보온내의 착용률이 월등히 높아졌다”고 말했다.

멋쟁이 정 대리가 즐겨보는 남성잡지에는 고가의 패션 브랜드들이 내세우는 당대의 아이템들이 빼곡하다. 올겨울 유행할 정장 구두를 소개하는 페이지에 내 시선도 따라 멈췄다. 최소 수십만원대인 그 구두들은 하나같이 밑바닥에 가죽 소재인 홍창을 사용하고 있었다. 신었을 때 편하고 멋있지만 마모가 빨리 되고 관리가 어려운 단점이 있는 홍창 구두는 카펫 위에서 신기에 최적화된 것이다. 출퇴근 때 도보로 20여분을 움직이는 그의 발보다는 운전기사와 카펫이 있는 환경 위주로 생활하는 고위 임원급에게 팔려야 할 구두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정 대리는 ‘셔츠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는 것이 신사의 법칙’, ‘반팔 셔츠는 절대 금기’라는 그 패션잡지의 권고사항을 야무지게 지키며 여름 내내 땀내깨나 풍기고 다녔다. 그 권고사항 역시 외부 온도와 별 상관이 없는 자동차와 실내공간에서 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만 정 대리는 오늘도 그렇게 입고 신으며 ‘차도남’과 말단 대리 사이의 괴리감을 줄인다.

지난주에는 내가 일하는 회사에도 임원 및 조직장 인사가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희망찬 새 출발을 알린 신호탄이었지만, 다른 많은 이들에게 고용계약 종료를 알리는 예고사격이었다. 공문을 열람한 직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회사 한편의 흡연실로 모여들었다. “왜 덕장(德將)은 좀처럼 고위직으로 승진하지 못하는 거죠?”라는 후배의 물음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지장(智將)이나 맹장(猛將)이 약진했다면 할 말이 있었으련만, 남은 자들의 대부분은 일에 최적화된 무색무취형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4년 전에 모셨던 지장이자 덕장인 부장에게 전화로 작별인사를 고하며 남은 자로서의 괴리감을 덜어보려 애썼다. 몇 달 뒤 ‘히트댁’이 필요 없을 때쯤 찾아뵙겠다는 약속과 함께.

글·일러스트레이션 H기업 이대리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esc : 이대리의 직장생태보고서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