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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3.27 18:31 수정 : 2013.03.27 18:31

이대리 제공

[매거진 esc] 이대리의 직장생태보고서

맹추위에 두툼한 목도리를 말아 올리던 겨울이 거짓말처럼 지나갔다. 출근길에 마주하는 도심의 꽃봉오리들이 새봄을 알리지만 건강검진 일정을 통보받은 직장인들의 마음은 아직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고 있다.

지난 1년을 몇 가지 수치로 요약해주는 건강검진 결과표는 우리를 ‘쫄게’ 한다. 세월과 과로, 연이은 회식에도 불구하고 도도한 지표를 유지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체로 경력이 쌓일수록 건강은 퇴보한다.

따지고 보면 이유는 간단하다. 적당히 움직이지 않아서, 충분히 자지 못해서, 조절하며 먹지 않아서 그렇다. 새벽까지 폭음한 뒤에도 아침 일찍 텀블링하며 일어나 냉동피자를 우적우적 씹어 먹던 신입사원 시절에는 ‘검진 비용 아껴서 보너스로 주면 좋을 텐데’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역류성 식도염, 미란성 위염, 알코올성 지방간, 고지혈증 등 매년 새로운 친구들(?)을 사귈 때마다 ‘사회라는 도축장에서 등급 외 판정을 받는 불량 축산물이 될 수도 있겠구나’라는 불안감이 앞선다. 또한 우리는 매년 인간미 떨어지게 건강관리에 철저하던 사람이 검진을 전후해서는 가장 인간적인 체면을 유지할 수 있음을 확인한다.

과체중과 당뇨를 10년째 달고 다니는 A기업의 ㄱ부장은 “아내가 언제 나를 버릴지 모른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한다. 농담 섞인 말이지만 “건강 지표가 떨어질수록 이사 갈 때 아내가 사랑하는 반려견을 꼭 끌어안고 있어야 한다”는 부연 설명에는 처연함이 묻어난다. ㄱ부장과 함께 부서 내 ‘당뇨콤비’를 이루는 ㄴ차장은 “괜히 결혼 초기부터 생명보험을 과하게 부어온 것 같다”며 “나의 부재가 가계곤란으로 이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가장의 의무 중 하나지만 현재로서는 나보다 보험의 존재감이 더 커져버린 것 같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악화되지 않은 건강 지표는 부서 회식을 이끌 수 있음을 역설하는 면허증이자 유통기한이 남아 있는 가장으로서의 증명서다.

이 부서에 함께 근무하는 만 29살의 ㄷ대리는 ‘건강 염려족’이다. 각종 건강정보프로그램과 보양식에 열광하는 그는 상사들이 앓는 소리를 할 때마다 자신도 어느 한구석이 아파오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불안감에 떨던 ㄷ대리는 추가 부담금을 무릅쓰고 전신 암 조기발견을 위해 피이티 시티(PET CT)와 대장내시경을 신청했다. 그에게 정밀한 검진항목은 정신적 안정을 부여하는 일종의 쇼핑이다.

오랫동안 인사노무담당으로 일한 ㄹ과장은 “고위직에서 승진 대상자를 선발할 때 중요한 고려 요소 중 하나가 건강상태”라며 “능력이 출중하다 해도 갑자기 변고가 생길 만한 사람은 피하고 보는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말한다. 혹시 모를 임원 승진 기회를 생각해서라도 운동을 시작해야 할 노릇이다.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새 학기의 신체검사와 체력장은 일종의 축제였다. 성장한 키와 몸무게, 체력을 확인하는 때였다.

성장은 기쁨을 수반하고 퇴보는 실망과 슬픔을 이끈다. 무게중심이 어느 방향으로 기울지는 온전히 스스로에게 달렸다. 조금 불편하겠지만 계단을 통해 오르내리고 짬짬이 더 걷자. 내년 이맘때 정체와 퇴보에서 벗어난 지표를 받으면 사춘기에 훌쩍 큰 키보다 더 기쁘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직장인들이 오롯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다. 건강하기라도 하자.

H기업 이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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