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4.10 16:57
수정 : 2013.04.11 11:47
이대리의 직장생태보고서
H기업 대리
연애하기 좋은 계절이다. 아직 혼자 화장실 가는 것을 불안해하는 ㄱ과장의 아들도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반에서 제일 예쁜 여자아이랑 짝이 됐다고 등굣길 발걸음이 가볍단다. 쇠약한 노총각 ㄴ대리도 체면치레를 위해 기꺼이 외투를 벗어줄 수 있을 만큼 따스한 사랑이 피어나는 시절이다.
연초 인사발령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직무조정을 통해 새 일을 맡은 직원들은 새 동료에게 익숙해졌고, 연애로 이어지기도 한다. 수년간 지켜본 바로는 사내연애는 몇 가지 예술성을 띤다.
첫째,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사이의 ‘추격 종합예술’이다. 인류는 언어와 호기심을 기반으로 지금까지 발전해왔다. 내재된 습성은 타인의 연애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사우들의 호기심은 마약탐지견을 능가하고 소문의 전파속도는 최우수 영업사원의 실적추진보다 맹렬하다. 수면 위로 떠오른 사내 커플의 연애는 ‘입으로만 축복, 실제로는 훼방의 연타석’에 직면한다. 애인의 이름을 동성의 이름처럼 저장해 부재중 전화벨이 울리더라도 누군지 알아채지 못하게 했다는 경험담은 이미 구식이 됐다. 개인정보보호에 민감한 ㄷ대리는 “혹시나 전산부서에서 대화 내용을 저장할까봐 사내 메신저도 사용하지 않고 오직 휴대전화 통화만 연애기간 내내 고집했다”고 한다.
ㅁ기업 ㅇ대리의 회사에서 일어난 이야기는 공작원급으로 시작해 개그맨급으로 마무리된 사례다. 등을 맞대고 일하던 두 사람이 2년간 아무도 모르게 사귀었다. 청첩장을 돌리자 동료들은 높은 수준의 ‘기도비닉’(企圖秘匿)에 경악했다.
이들은 다른 방면에서도 솜씨가 탁월했는지 결혼식 전에 임신을 했고 결혼 7개월 만에 아기를 낳았다. 차마 속도위반을 고백할 수 없었던 그들은 동료들에게 “칠삭둥이라서 아기 건강이 걱정”이라고 했다. 1년 후 돌잔치에 초대받은 동료들은 스크린에 상영되는 아기의 신생아 시절 사진을 보고 경악했다. “4.9㎏짜리 칠삭둥이라니!”
평생을 함께할 인적자원을 발굴한다는 차원에서 보면 사내연애는 원석을 캐내는 ‘자원개발의 종합예술’이라 할 수 있다. 우연을 가장한 은근한 접선 시도로 잠재적 경쟁자의 진입을 방어하고, 주변인을 설득해 우호적 여론을 환기시키는 것은 자원 보유국을 접촉하는 나라의 외교 활동만큼 숭고하다. 주위를 둘러보면 적령기를 넘겼지만 준수한 싱글들이 꽤 있을 테니 ‘먼 나라’보다 접근성 좋은 ‘이웃 나라’를 먼저 살피는 것이 일의 순서일 듯싶다.
회사라는 곳은 묘하게도 그 규모에 관계없이 타인의 이야기가 쉽게 전해지는 화학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어딜 가나 있는 사내 호사가들의 입소문은 아메바처럼 번식해 온 사무실을 떠돈다. 영원을 약속하든 각자 갈 길을 가게 되든 간에 세상의 모든 연애처럼 추억은 남을 테니, 일단 발각됐다면 영양가 없는 훈수는 과감하게 외면하는 것이 예술적 완성도를 높여줄 것이다. 단, 불가피하게 연애가 결론을 보지 못하고 종식됐다면 후유증 최소화를 위해 후일담 발설은 자제하는 것이 서로의 장기근속에 효과적이다. 이를 ‘외면과 자제의 종합예술’이라 부를 수 있다.
가끔 유부남녀들이 신분을 망각하고 벌이는 막장 드라마는 예술성에 흠집을 내지만, 난관을 극복하는 사내연애 이야기는 대체로 아름답다. 많은 장애물을 뛰어넘고 얼마 전 종합예술의 피날레를 장식한 팀 후배에게 축하와 경의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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