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4.24 18:40
수정 : 2013.04.24 20:24
|
이대리 제공
|
이대리의 직장생태보고서
최근 주목을 끄는 용어를 꼽아보라면 단연 ‘빅데이터’(Big Data)가 상위에 속할 것이다. 웹툰 <가우스전자>는 빅데이터를 “보고서를 통과시켜주는 마법의 키워드”로 풍자하며 “얼마 전까지 보고서에 소셜 안 붙으면 통과 안 됐잖아요”라는 대사를 덧붙였다.
과거를 반추해보면 실제로 시대별로 보고서를 통과시켜주는 ‘마법의 열쇳말’은 꾸준히 있었다. 1990년대의 ‘세계화’나 ‘엔(N)세대’, 2000년대 초중반의 ‘웹2.0’, 2010년대의 ‘에스엔에스’(SNS)와 같은 단어들은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리고 지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그 단어(單語)는 간데없다.
온갖 매체와 산업계가 ‘빅데이터’ 열풍에 휩싸이면서 해당 용어에 대한 직장인들의 감수성도 높아지고 있다. 발빠른 기업들은 분석 장비 도입에 나섰고 정부기관은 사업단을 꾸렸다. 계획대로라면 영화 <왓 위민 원트>의 닉(멜깁슨 분)처럼 상대방의 마음을 척척 읽어낼 것만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기업은 생산한 재화를 팔아야 하는 숙명을 지녔다. 더 많이, 더 잘 팔기 위해 상대를 더 깊이 알아야 한다는 근원적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고, 아마도 ‘빅데이터’는 그런 갈증이 반영되어 추대되고 각광받게 된 개념일 것이다.
A기업 ㄷ대리는 입사 때부터 꾸준히 해온 사내제안을 지난해부터 그만뒀다. 고심을 거듭해 입력한 제안이 아무런 부연설명 없이 기각되는 것에 지쳤기 때문이다. 특히 제안이 기각되고 1~2년이 지난 뒤 해당 내용이 ‘저작권’ 없이 신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할 때면 복장이 터졌다. 그는 “제안에 대한 첫 평가는 해당 부서장이 하게 되는데, 전담부서가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를 타 부서가 낸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어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B기업에 근무하는 ㅁ대리는 영업사원이다. 하루 평균 5~7곳의 고객사를 방문하는 그는 현장의 의견들을 메모해두고 주기적으로 항목에 따라 분류해 보고서로 제출한다. 보고서는 팀장과 부장, 임원을 거쳐 최고경영자(CEO)의 손에 쥐여지는데, 이 과정에서 일부를 제외한 안건들은 자동 소멸된다. ㅁ대리는 “수개월 전 보고한 안건이 폐기되고 경쟁사가 우리에 앞서 실행하는 모습을 볼 때면 일할 맛이 뚝 떨어진다”고 전한다.
부서이기주의와 인의 장막이 가치 있는 데이터의 활용 가능성을 원천 차단한 셈이다.
미국 맥주기업 보스턴비어컴퍼니의 짐 쿡 회장은 “40명의 현명한 소비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그 어떤 컨설턴트가 내놓는 연구 자료를 열람할 때보다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기고문을 통해 말했다. ‘핵심은 데이터의 크기가 아닌 대상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라는 것이다. 그는 현장에서 고객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가장 도전적이고 지적인 활동이라고 단언한다.
빅데이터 분석이 그저 시장조사로 쭉 불리기를 기대한다면 나는 시대의 변화에 너무 둔감한 사람이 되는 걸까? 비싼 돈 들여 분석 시스템을 도입하는 데 앞서 제 손안에 쥐고 있는 ‘스몰데이터’(Small Data)의 활용도를 높이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큰맘 먹고 산, 비싼 새 옷이 장롱 안에 수년간 방치해 온 옷과 거의 흡사한 것임을 알고 낙담한 경험을 떠올려봄직하다.
이대리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