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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5.08 15:16 수정 : 2013.05.08 16:07

‘바퀴벌레 가족’의 탄생

지난해 이맘때쯤이었다. 창립기념일 휴무를 즐기기 위해 아침 일찍 남산길을 걷던 나는 두 개의 특급호텔 앞에서 특이한 장면을 봤다. 운전사를 따로 둔 검은 대형 승용차들이 호텔 입구에 줄지어 서 있던 것이었다. 첫번째 호텔에서 ‘국빈이 온 건가?’라고 생각했지만 두번째 호텔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보게 되자 궁금증이 동했다. 로비의 직원에게 물어보니 기업의 임원들이 모이는 조찬회 행사가 있었다고 했다. 그는 “이름을 알 만한 회사의 임원들은 일년에 열두어번 이상 이런 모임에 참석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뒤 함께 근무하는 임원이 지난 한달간 소화한 일정을 돌이켜봤다. 주중에는 외부 조찬모임에 두번 참석했고, 아침 7시50분에 사내 회의도 한번 있었다. 일과 뒤에는 주 3회가량 저녁식사나 술자리를 겸한 자리에 참석했으며 한달에 서너번 주말 골프약속을 소화했다. ‘일과 삶의 균형’이라든지 ‘저녁이 있는 삶’ 같은 문구는 수년 전부터 화두가 되어왔지만 회사의 상층부로 갈수록 그런 말은 아직 일종의 이상향일 뿐이라는 결론을 새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쯤에서 몇 가지 생각을 해본다. ‘저렇게 숨 돌릴 틈 없이 살면 보람과 긍지, 창의성이 마구 솟아나는 걸까?’ ‘호텔이나 골프장, 고급식당에서 열리는 모임 중 일부를 간단한 티타임으로 대체한다면 한해 얼마만큼의 비용이 절감될까?’ ‘그들의 가족들은 어떤 희생을 감내하고 있는 걸까?’ 따위의 궁금증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굴지의 A그룹에서 퇴임한 한 전직 임원은 “자연인이 된 뒤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은 나를 찾는 전화의 대부분이 뚝 끊겼던 것”이라며 “내 명함을 필요로 한 사람과 나를 필요로 한 사람을 구분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품위있게 명함을 교환하기 위한 ‘관계 맺기 비용’은 교육비, 업무추진비, 판공비, 접대비, 회원권 등 다양한 항목으로 분류된다. 그 특성상 대한민국 전체의 시장규모를 종합하기는 어렵겠지만, 어림잡아 어지간한 대기업 하나의 일년 매출액 이상은 되지 않을까? 어쨌든 이것들은 ‘지출을 가장한 투자’로 여겨지기에 견고한 시장으로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과잉 투자’가 일어나는 곳도 분명히 있다. 사회복지사 B는 “만약 기업단체가 ‘관계 맺기 비용’의 일부를 사회공헌 비용으로 전환한다고 선언하면 기업 이미지 개선과 사회적 책임 이행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한 금융회사의 C상무는 D대리에게 “자네 형제들도 ‘바퀴벌레’로 커왔는가?”라고 물었다. 말인즉슨 아버지가 현관문을 여는 소리만 들리면 모여 있던 바퀴벌레들이 일제히 흩어지는 것처럼 각자 방으로 도망가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쓴단다. ‘가족 관계의 단절은 높은 연봉과 교환되는 가치’라고 오랜 시간 공감하고 묵인해 왔기에 지금도 ‘바퀴벌레 가족’의 탄생은 계속되고 있다. 대체휴일제 입법이 유보됐다고 한다. 바퀴벌레 가족 ‘박멸’의 길은 역시나 멀고도 험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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