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6.05 19:50
수정 : 2013.06.0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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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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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리의 직장생태보고서
유통업체에 근무하는 명 대리는 전자결재 서류를 올리기 전 같은 내용을 인쇄해 상위 결정권자들을 미리 찾아다니며 사전 설명을 한다. 전자결재의 사전적 의미는 ‘대면 보고하는 시간을 최소화하고, 문서 작성 및 관리의 효율성을 증대할 목적으로 전산망을 이용해 결재를 처리할 수 있도록 한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회사에 전자결재 시스템이 도입된 지 5년이 지났지만 명 대리는 축적된 경험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김 부장에게 전자결재란? 종이가 꼭 필요한 것. 박 상무에게 전자결재란? 부하직원이 조아리는 기회를 박탈하는 괘씸한 물건.’ 즉, 컴퓨터에 친숙한 90년대 이후 학번이 아닌 경우 인쇄물과 부하직원의 사전설명이 없는 전자결재 요청은 ‘권위에 상처받는 기분’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명 대리는 “여러 번 반려된 결재요청 건을 인쇄해 직접 찾아가 설명을 했더니 그대로 통과되더라”며 “컴퓨터가 보편화되면서 종이 사용량이나 전통적인 우편물 양 등은 오히려 더 늘었다는 조사결과가 있으니 시스템에 발목 잡힌 사람이 나 말고도 많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전자결재 시스템 도입을 지시한 사장님도 아직 대부분 종이문서에 서명을 하시니 일에 소요되는 시간은 5년 전과 비슷하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사무실 곳곳에는 좋자고 만들어놓은 제도나 장치가 주객전도되어 사람을 옭아매는 경우가 종종 나타난다. 인사철에 사무실을 가득 채우는 다년생식물, 난의 축하 행렬은 사무실 막내들에게 ‘농부 임무 추가’를 뜻한다. 심산유곡에서 고고히 향기를 내뿜는 모습이 선비 같다고 여겨 예를 갖춘 축하 선물로 인기가 높은 난은 관리가 매우 까다롭다. 물 주는 시간대나 주기, 비료 뿌리기와 온도 유지, 일조량 체크 등 다양한 요소에 따라 생사가 엇갈리는 이 녀석은 대체로 선물받는 사람과 관리 인력이 따로따로 존재한다. 입사 8년째 막내인 최 주임은 “입사 초기 몇 뿌리의 난을 저세상으로 보내고 갖은 욕을 배부르게 먹은 뒤 이제는 화원을 해도 될 만큼 노하우가 붙었다”며 “일개 풀뿌리마저 상사의 권위와 동일시해야 한다는 피로감이 들기도 하지만 조기퇴직이 보편화된 시대를 맞아 귀농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마음을 가진다면 해볼 만한 일과”라고 설명했다.
흔히 ‘사판’이라고 줄여 말하는 사내판매도 급여생활자들에게 주객전도 상황을 겪게 한다. 자사의 상품을 경쟁력 있게 기획하고 시장에 팔아 이윤을 남기는 것은 더 많은 보상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뒤처지거나 매력도가 낮은 상품은 도태되어 ‘사판’이라는 이름으로 월급의 일부를 털어간다. 금융기업에 근무하는 조 대리는 “매년 인사 시즌마다 계열 보험회사 상품을 ‘사판’하는 건 겪을 때마다 유치하다고 생각한다”며 “시장에서 승부가 되지 않을 경쟁력 낮은 상품에 내 급여를 바치라는 암묵적인 강요가 충성도와 몰입도를 떨어뜨리기 일쑤”라고 토로했다.
직장인들은 오늘도 뿌리 깊은 ‘주객전도’ 상황들을 겪으며 ‘소통’이라는 단어를 발에 차일 만큼 흔하게 듣는 아이러니 속에 놓이고 있다.
H기업 이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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