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7.24 20:03
수정 : 2013.07.25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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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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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리의 직장생태보고서
욕구 단계 이론으로 유명한 심리학자 매슬로는 인간이 생리적 욕구나 안전 욕구 같은 하위 욕구를 충족하는 것을 전제로 사회적 욕구, 존경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를 차례로 추구하게 된다고 정의했다. 하지만 그는 죽기 전에 “욕구 피라미드를 뒤집어 놓아야 옳았다”고 말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를 생리적 현상처럼 자연스럽게 여긴다는 뜻이겠다.
갈 곳 잃은 잉여생산물이 넘쳐나고 사회 시스템이 일정 수준의 생활 안전을 책임져 주면서 많은 사람들은 타인이 나를 알아봐주고 동경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별로 눈에 띄거나 남이 동경할 만한 거리가 없는 사람들은 특이한 방식으로 자아실현의 욕구를 충족하기도 한다.
대기업에서 고객 지원 업무를 17년간 해온 ㄱ차장에게 회사는 곧 자아다. 비록 고객의 불평불만을 맞닥뜨리고 해결하는 을의 삶을 살지만 일 년에 두세 번 있는 외주업체들과의 계약 시기는 그를 ‘슈퍼 갑’으로 만들어준다. 동료 직원들은 그와 함께 계약 업무를 진행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우리 회사와 이런 선구적이고 대표성 있는 프로젝트를 하게 되면 계약하겠다는 업체가 줄을 서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을 앞세우며 매번 엄청난 ‘단가 후려치기’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대규모 회식이 있는 날이면 해당 식당에 자사 제품을 강매하거나 몇만원어치 물품을 구입할 때도 복수 견적서를 요구하는 등의 행위로 회사의 이익을 높여준다고 착각하며 자아를 실현하고 동료들의 낯을 뜨겁게 만든다. ㄱ에게 크건 작건 회사가 준 지급능력은 곧 그의 권위를 뜻한다.
번번이 승진에서 떨어지는 ㄴ에게 고가 의류와 가방 등의 액세서리는 ‘두 번째 계급장’이다. 비싼 새 가방을 들고 출근한 날이면 “언니, 너무 예뻐요. 이거 얼마나 주고 사셨어요?” 같은 칭찬을 들으며 그는 스스로 높아진다. ㄴ에게 소유는 곧 존재의 증명이지만 입사 동기인 수수한 차림새의 ㄷ이 능력을 인정받을 때마다 그녀의 자아는 무너진다.
ㄴ을 무너지게 하는 ㄷ은 브랜드 관리자다. 그가 맡은 브랜드는 올해 들어 떴다. 전임자가 수년간 공을 들인 것이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ㄷ은 개인 블로그와 트위터 등을 통해 모든 과정을 주도적으로 계획한 것처럼 허풍을 늘어놓는다. 사정을 알 리 없는 일부에서는 그를 특강 강연자로 모시기까지 하지만, 몸담은 업계에서 이제 ㄷ은 ‘주.달’(주워 먹기의 달인) 혹은 ‘약장수’로 통한다.
ㄱ에게서 회사의 간판이 사라지는 날, ㄴ이 더 이상 비싼 가방을 살 수 없을 때, ㄷ이 한참을 공들여 놓은 프로젝트를 후임자가 날름 주워 먹을 때 그들은 무엇으로 살게 될까?
얼마 전 영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신간 추리소설의 작가가 해리 포터 시리즈를 쓴 조앤 캐슬린 롤링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화제가 된 바 있다. 롤링은 “작품에 대한 기대와 홍보 없이 독자, 비평가들에게 조언을 얻는 것은 엄청난 일이자 순수한 즐거움”이라고 말했다. 명성과 부를 쌓은 뒤라서 이런 도전을 좀더 쉽게 할 수 있었겠지만, 한 직장인으로서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한 소식이었다.
회사의 이름값, 담당자로서의 권한, 그리고 그동안의 평판을 모조리 초기화한 뒤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면 우리는 롤링처럼 순수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까?
H기업 이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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