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8.28 19:36
수정 : 2013.08.30 16:44
이대리의 직장생태보고서
회사 구성원들은 계약관계로 엮여 있다. 그래서 상호간 직급을 붙여 호칭한다든가 존댓말을 사용할 것을 권고받는다. 하지만 우리는 꽤 자주 계약관계가 가족관계로 전환되는 것을 목격한다. 바로 ‘형님’, ‘언니’ 같은 호칭이 사용될 때다. ‘형님’, ‘언니’ 호칭을 사용하는 데서 남성과 여성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관찰된다. 남성들은 비공식 석상, 특히 술자리에서 친분의 확인과 관계의 확장을 위해 ‘형님’ 호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여성들의 경우 회사 안에서도 ‘언니’ 호칭을 쓰는 데 스스럼없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었다.
한때 조직폭력배와 아줌마의 공통점으로 우르르 몰려다니며 형님 호칭을 사용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비슷한 맥락으로, 드러내놓고 언니 호칭을 사용하는 데는 그들 사이의 결속력을 다지려는 목적이 있었으리라. 소수집단은 뭉치기 마련인데,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저수준의 여성고용률을 나타내니까. 하지만 단결과 연대가 늘 전진과 해방으로 연결되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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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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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간 지점에서 근무하다가 본사 지원부서로 발령받은 A은행의 ㅈ대리는 ‘언니들’로부터 뜻밖의 지적을 받았다. 입사 21년차인 ㄱ대리는 ㅈ대리를 탕비실로 호출한 뒤 “여기 분위기에 익숙해질 때까지 오늘 들고 온 것 같은 원색 가방은 사용을 자제해주기 바라” 하고 운을 뗐다. 그리고 “별도로 이야기해주기 전까지 면접 볼 때처럼 차분한 색상 위주로 옷을 입고, 7년차가 될 때까지는 출퇴근시 자가용은 몰고 다니지 마”라고 충고했다. ‘튀지 말라’는 기분 나쁜 참견이었지만 맺음말은 더 뜨거웠다. “그래도 내가 ㅈ대리를 좋게 봐서 빨리 말해준 거야.”
몇 주의 시간이 흐른 뒤 ㅈ대리는 탕비실 외에도 화장실이나 여직원 휴게실에서 이런 유의 조언을 가장한 억압이 성행한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그곳에서 뭉치는 무리 중 누군가와 작은 언쟁이라도 벌이면 한순간 ‘공공의 적’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입사 7년차에 접어들어 이제 가끔 자가용 출퇴근을 하는 ㅈ대리는 내키진 않지만 ‘언니 문화’ 속에서 자리를 잡았다. ‘여왕벌’ 격인 왕언니가 다이어트를 위해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기 시작하면 지지의 의미로 외식을 삼가야 하는 것도 익숙하다. 큰언니가 일을 하다가 틀리면 즉석에서 지적하지 않고 그 아래 직원에게 조용히 수정하라고 전달하는 지혜도 갖췄다. 회식 자리에서 양해를 구하고 팀장보다 먼저 일어나는 경우는 가끔 있지만 언니보다 먼저 가는 것은 터부다. 언니가 2차로 노래방을 가고 싶다면 ㅈ은 잽싸게 ‘물 좋은’ 후배 남직원을 섭외한다. 가정생활이 원만치 않은 언니 앞에서 신랑 자랑과 자식 자랑은 후폭풍을 일으키니 사전 정보 취합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얼마 전 A은행은 조직개편과 함께 일부 직원들이 층간 이동을 했다. ㅈ대리와 같은 층에 근무하던 ‘왕언니’도 2개 층을 옮겨야 했다. ‘언니 의전 태스크포스팀’이 구성됐다. 가장 편히 팔을 뻗어 쓸 수 있는 위치의 화장실 캐비닛을 ‘왕언니’를 위해 비워주고 나머지 칸을 ‘짬밥대로’ 배분하는 중대사를 진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군기 센 부대만큼 빡빡한 ‘언니들의 세계’다. 그럼에도 자매님들이 겪은 부당함에 돌직구를 날려주는 왕언니의 역할은 이 체제를 공고히 하는 힘이다. 막내의 막장 남친을 따끔하게 혼내준다거나 자칫 잃기 쉬운 여사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다 같이 소매를 걷어붙이는 일은 남자들 세계에서 좀처럼 일어나지 않으니까.
H기업 이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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