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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9.25 19:39 수정 : 2013.09.26 13:46

이대리 제공

이대리의 직장생태보고서

주어진 일의 상당 부분을 협력업체와 전화로 진행하는 ㄱ의 컴퓨터 화면에는 항상 몇 개의 메신저 창이 깜빡댄다. 사내 업무용 메신저는 가끔 전달사항들이 오가는 통로일 뿐 활용도는 가장 낮다. 오랫동안 써온 N메신저의 ‘투명 대화창’들은 하루 종일 시시콜콜한 소식들을 전해준다. 올해 들어서는 손가락이 더 바빠졌다. 모바일에서만 사용 가능하던 K톡이나 L메신저를 컴퓨터에서도 쓸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9월 들어서는 K톡 피시(PC) 버전이 ‘엑셀 스타일’의 채팅창을 제공함에 따라 ㄱ과 같은 ‘몰래 채팅족’들은 좀더 당당하게 메신저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다. 덕분에 제시간에 일을 끝내지 못하고 늦은 시각까지 사무실에 남는 경우가 잦아졌지만 오히려 마음은 편하다. 상사들은 “너무 열심인 것 아니냐”, “젊었을 때 몸 챙겨라, 나중에 골병 든다”며 ㄱ을 다독이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ㄱ이 일과 중 상당 시간을 ‘메신저질’에 할애한다는 것을 잘 아는 동료들은 이런 상황이 못마땅하다.

증권가에 근무하는 ㄴ에게 메신저는 존재감을 확인하는 도구다. 2011년 이후 정재계를 망라한 속칭 ‘증권가 찌라시’는 잦아들었지만, 가끔 손에 쥐는 연예계 ‘카더라 통신’은 인기 만점이다. ㄴ은 친구 ㄱ에게 ‘카더라 통신’을 전하고 ㄱ은 친한 지인들에게 확산시킨다. ㄱ의 상사들 중 몇몇은 “ㄴ씨로부터 새 소식 올 때 되지 않았냐?”며 중독 증세를 나타내기도 한다. ‘새 소식’을 종용받을수록 ㄴ은 자아를 인정받는 것 같아 뿌듯하다. 가끔 허위사실 유포나 명예훼손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여론이 환기되지만, ‘인정의 욕구’를 억누르기엔 역부족이다.

누군가에게 메신저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나라의 파트너와 손잡고 생산성을 창출하는 유용한 도구다. 하지만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플픽’과 대화명을 통해 자아를 표출하는 도구이자 뒷담화의 장일 뿐이다. 지급한 급여 이상의 성과를 기대하는 회사로서는 후자의 경우는 당사자뿐 아니라 다른 직원들의 생산성까지 갉아먹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직장인들은 가장 큰 스트레스 중 하나로 초과근무나 야근, 휴일근무를 꼽는다. 그런데 만일 회사가 “근로계약한 시간에 메신저로 잡담하느라 낭비한 시간을 물어내라”는 논리를 앞세운다면 적절하게 반박할 수 없는 직장인들이 꽤 많지 않을까?

반면 메신저를 통한 근로시간 외 업무지시도 일상화됐다. ㅂ기업의 고객지원팀장은 수시로 팀원들에게 시시콜콜한 지시사항을 발송한다. K톡을 통해 날리는 ‘별것도 아닌’ 지시들은 다음날 출근해 5분이면 처리 가능한 일들이지만, 팀원들은 마음의 평화에 상처를 입는다. ㄷ대리가 메신저 확인에 소홀해진 어느 날 “왜 요즘은 즉각 지시를 확인하지 않냐”는 다그침이 날아들었다. 숫자 ‘1’ 표시가 남아 있을 경우 미확인 상황을 나타낸다는 것을 팀장이 알게 됐기 때문이다. 수년 전 폴크스바겐이나 블랙베리 등 외국기업은 메신저나 이메일을 통한 근로시간 외 업무지시에 대해 수당을 지급하기로 합의하거나 노사협의를 통해 금지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인식 때문인지 이에 관한 논의는 미약하지만, 구한말 개화기처럼 언젠가는 닥칠 일이니 진지하게 생각하고 준비해야 할 상황 아닐까? 사실 메신저의 알림 설정을 꺼두고 몇 시간 뒤에 확인한다고 해도 큰일 날 일이 없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전서구를 띄우면서도 사람은 살았다.

H기업 이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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