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1.13 20:18
수정 : 2013.11.14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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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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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라이프] 이대리의 직장생태보고서
회사에서 ‘공사 구분’이라는 표현은 유행가 노랫말 속 ‘사랑’이나 ‘이별’이라는 단어의 쓰임만큼 흔하다. 업무와 조직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그렇다고들 하고, 이는 곧 감정의 배제를 전제한다.
감정의 배제를 돕기 위해 우리는 규율을 만든다. 사회에 법이 있고 회사에는 사규가 있으며 친구들끼리 계모임을 하나 만들어도 계칙이 생긴다. 물론 ‘법 없이도 사는’ 것이 가장 좋은 경우겠지만, 애매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규율은 혼돈을 막아준다.
하지만 계급사회에서 규율은 종종 감정과 자의적 판단을 넘어서지 못한다.
A기업의 영업본부장 ㅂ은 매정하다. 성과급 배분이나 권고퇴직자 선정 등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하는 분야에서 특히 그렇다. 한번 결정이 되면 아무리 극렬한 항의가 발생해도 번복은 없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그 매정함을 ‘공사 구분’으로 여긴다. ㅂ은 5년차 기러기 아빠다. 유학파 ㅇ대리는 매정한 ㅂ으로부터 총애를 받는다. ㅂ의 자녀가 유학서류를 준비하는 단계에서부터 영문 에세이를 쓰는 것까지 본의 아니게 도왔기 때문이다. 한번 붙은 관성은 쉽게 제동이 걸리지 않는다. 일년에 두번 방학을 앞둘 때면 기러기들의 조우를 위한 항공권 예매 역시 자연스럽게 ㅇ대리의 업무가 됐다. 이밖에도 주말 아침 본부장 아파트 주차장에서 장터가 열릴 때 잘못 주차된 차를 빼주기 위해 출동한다거나 컴퓨터를 손봐주기 위해 집에 들르는 것은 ‘양념’이다. 정말 싫은 일이지만 회계연도가 마감된 뒤 ‘감정적’으로 입금된 성과급은 ㅇ대리를 위로한다. 동시에 사역의 대가가 입금된 만큼 다른 동료의 몫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게 한다.
B기업은 6년 전부터 매주 금요일을 ‘가족의 날’로 정하고 정시 퇴근과 자율복 착용을 권고한다. 시행 초기에는 보수적인 사풍 덕에 청바지가 허용 대상인지 아닌지에 대해 논란이 일었다. 갑론을박이 한참 동안 이어지자 인사팀이 ‘애정남’처럼 나섰다. 찢어진 청바지나 가슴골이 깊게 파인 셔츠, 화려한 금속 장식이 달린 옷의 착용을 자제하자는 내용의 공지가 떴다. 이후 ㄱ주임은 매주 금요일마다 청바지를 애용해왔다. 그리고 얼마 전 인사이동이 있었고 ㄱ은 새로운 팀장을 모시게 됐다. 새 팀장과 함께한 첫 금요일, ㄱ은 청바지 착용 금지를 명받았다. 수년 전에 공지된 인사팀의 지침을 보여줘도 새 팀장은 들은 척 만 척. 그의 허용 한계점은 ‘아이비리그 복장’까지다. 어이없는 이유인즉슨 “광부의 옷을 사무실에서 입는 것은 예절이 아니며 몸매 라인이 드러나므로 여직원들 보기에 좋지 않다”는 것이다. ㄱ은 그 이후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느낌이 싫어서 금요일마다 넥타이만 벗은 정장 차림으로 출근한다. 직원들 눈에는 팀장의 발가락양말이나 양복바지 대신 입은 검은색 등산복 바지가 복장 예절계의 특급 테러지만 누구도 대테러 요원을 자처할 수 없다. ‘꼰대’는 건드리면 복수하니까.
업무상 시가총액이 최근 5년간 두배로 뛴 유사 업종의 C기업을 방문한 ㄱ주임은 놀랐다. 점심시간을 맞아 쏟아져 나오는 C기업 직원들의 옷차림에 개성이 넘쳤고 심지어 선글라스를 착용한 사람도 꽤 많았기 때문이다. C기업의 성장에 대해 증권가에서는 이런저런 분석을 내놓지만 동종업계에 근무하는 ㄱ의 눈에는 자율성에 기반한 직원들의 활기찬 에너지가 눈에 띈다. 그리고 그들은 업무상 만난 누구보다 공사 구분이 확실했다.
H기업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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