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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1.08 19:53 수정 : 2014.01.10 15:50

[esc] 이대리의 직장생태보고서

늦은 점심시간, 흰 셔츠에 실크넥타이를 맨 한 중년 남자가 식당에 앉아 대부분의 뉴스에 ‘속보’라는 표현을 쓰는 채널을 보며 말했다. “귀족노조 놈들. 저렇게 불법파업을 해대니 나라가 이 모양이지.” 티브이에서는 철도노조 파업 이후 불편을 겪는 시민들의 인터뷰가 나오고 있었다. 뒷모습이 낯이 익어 자세히 보니 ㅂ전무다.

질문 하나. ‘노동자’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당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가지는? 최근 철도노조와 정부의 대립을 보며 ‘파업’을 떠올린 사람도 있을 테고, 그 과정에서 덧씌워진 ‘귀족’이라는 단어가 생각나기도 할 것이다. 또한 장기간 사측과 대립해온 두 자동차회사의 노동자들에게 내려진 거액의 배상 판결에 힘입어 ‘불법’이라는 키워드도 빼놓을 수 없겠다. 하물며 개개인이 입법기관 신분인 국회의원 중 한명마저 지난해 11월 국회 청소노동자의 노동3권을 정면으로 부정한 바 있으니, 어쨌든 ‘노동자’라는 낱말은 우리에게 썩 개운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나아가 요즘처럼 ‘안녕들 하지 못한’ 시절이면 노동자를 노동자라 불렀다가 ‘국가의 안녕을 위협하는 종북세력’쯤으로 지목돼도 무리가 아니다. 노동이 가진 본질적인 고귀한 가치와 무관하게 말이다.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고 노동력을 상품으로 삼는 모든 이는 노동자다. 매체에서 ‘귀족’으로 칭한 집단들보다 3배쯤 많은 급여를 받고, 한달에 400만원쯤 법인카드를 쓰는 ㅂ전무도 노동자다. 회사가 지원하는 학비로 미국 대학에서 엠비에이(MBA) 과정을 공부하는 ㅂ전무의 딸도 예비 노동자다. 심지어 펜 끝으로 귀족 작위를 수여한 미디어 종사자들 역시 소수 ‘군주’를 제외하면 노동자인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블루칼라만 노동자라고 착각한다. 그리고 애써 ‘근로자’라는 표현을 쓰며 화이트칼라로서의 우월감을 확인하려 든다. 사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이 따져 생각해야 하는 것은 ‘노동 대 근로’의 개념이 아닌 ‘노동 대 세습’이나 ‘노동 대 착취’임에도 말이다.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는 세습과 착취는 어느새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 노동 없는 세상은 멈추지만 나 하나쯤 눈감으면 편한 것도 사실이다. 화장실 옆 반평짜리 눅눅한 창고에 구겨 앉아 쉬고 있는 청소원 어머니들의 모습은 ‘담당 부서가 어떻게든 개선하겠지’ 싶었지만 몇년째 그대로다. 총무팀 후배에게 슬쩍 물어보니 “1000만원 안팎의 비용이 들 것 같아 섣불리 진행하기 힘든 작업”이란다. 어림짐작으로 전 임원이 1주일만 골프를 치지 않아도 마련할 돈이다.

쉴 때 허리 한번 제대로 펴게 할 돈은 쓰기 아깝지만, 누군가는 허리를 구부리고 쇠 작대기를 휘두르는 데 돈을 쓴다. 그리고 부러움의 대상에게 조금씩 심리적으로 다가간다. 그들의 부하직원인 나는 내 작은 안녕을 위해 이런 생각을 굳이 입 밖에 내지 않는다. 동료들 역시 대체로 그렇다. 그렇게 우리는 공분하는 감성을 거세해간다.

문득 최소한의 동료의식, 한줌의 인간미, 비상식을 향한 물음표 같은 것을 영영 분실할까봐 무서워진다. 15년쯤 이렇게 못 본 척 묵묵히 살다 보면 ‘속보’가 쏟아지는 식당 티브이 앞에서 비판인지 저주인지 모를 말을 툭툭 내던지지 말란 법도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다들 노동자 하기 싫다 하면 “소는 누가 키우노.”

사진 이대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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