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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6.14 20:09 수정 : 2012.09.14 09:43

“카레이서가 차에 몸을 맞추듯 이 기계에 제 몸을 맞췄어요.” 박진호씨는 색보정 일을 배울 때도, 회사를 옮길 때도 같은 기계를 썼다. 요즘 그는 앞에 놓인 4억원짜리 기기를 이용해, 올 한국영화 기대작 <도둑들>의 색보정 작업을 하고 있다.

[송기자·조피디의 엔딩크레디트 ‘세 줄 밑’] 디지털 컬러리스트 박진호

영화가 끝나고 배우와 스태프 이름이 화면 위로 흘러갑니다. 그 ‘엔딩크레디트’를 끝까지 보는지요? 서둘러 출입문이 열리니까, 남들이 일어나니까, 앉아서 보기가 좀 그렇다고요? 주연 1~2명을 뺀 ‘엔딩크레디트 세 줄 밑’의 배우와 스태프들을 글과 영상으로 만나보십시오. 영화를 같이 만들었지만, 당신이 보지 않았던 그들의 이름과 영화 이야기에 눈을 맞춰보세요. 2주에 한 번씩 찾아갑니다.

새벽에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지난해 사소한 오해로 틀어진 ‘그녀’였다.

“(영화 봤는데) 색이 예뻤어요. 오빠 이름도 봤고요….”

그는 첫사랑의 추억이 아렴풋하게 느껴지는 영화 <건축학개론>의 화면 색상을 파스텔톤으로 꾸몄다. 남들은 ‘스태프 일동’쯤으로 여기고 통째로 외면하는 영화 마지막 ‘엔딩크레디트’에서 자신의 이름까지 읽어낸 것이다. “감동했죠. 여자친구와 다시 사랑이 시작됐어요.”

그를 만난 곳은 서울 홍대 근처 케이티앤지(KT&G) 상상마당시네마 지하 3층. 작업실엔 손바닥만한 빛이 비집고 들어올 창문도 없다. 때론 침대도 되는 소파가 길게 뻗어 있다. 앉아서 영상과 마주하는 일이라, 4년 전 디스크 수술도 받았다고 한다. “여기에선 바깥에 비가 많이 와도 몰라요.”

4억원짜리 디지털 색보정 기기(베이스라이트)와, 1억원짜리 극장 영사기, 스크린이 보였다. “극장과 같은 환경을 갖춰, 관객 입장에서 색을 봐야 하니까요.”

‘스크린에 색칠하는 남자’ 박진호(34·상상마당 영화사업부 시네랩 팀장)씨. 엔딩크레디트에 ‘디아이(D.I) 혹은 디지털처리’로 표기되는 그는 흔히 색보정 기사로 불리는 디지털 컬러리스트다. “지하세계에 갇힌 듯한” 공간에서 <고지전> <댄싱퀸> <범죄와의 전쟁> <건축학개론> <은교> <돈의 맛> <후궁 : 제왕의 첩> 등 최근 화제작들이 그의 손을 거쳤다. 지금은 “<도둑들>(7월25일 개봉)의 색보정을 하고 있다”고 했다.

“화면에 차갑고, 밝고, 어두운 느낌의 색상을 주면서 영화에 감성을 불어넣는 일이죠.”

그는 색보정을 설명하며, ‘오후 1시’를 예로 들었다.

“1시 장면인데, 촬영은 몇 시간, 며칠이 걸릴 수 있죠. 그럼 그림자 위치, 해와 구름의 방향도 바뀌죠. 색보정을 통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찍은 듯 동일화시켜주는 거죠.”

그의 손에서 영화는 시간과 계절을 넘나든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 찍은 장면에 푸른빛의 색상을 씌워, 새벽으로 만들기도 한다. 여름 배경인 <은교>는 가을과 겨울에 촬영했다. “영화가 푸릇한 느낌이라, 전반적으로 녹색톤을 주면서, 나무의 (시든) 갈색잎도 녹색으로 바꿔주었죠.”

그는 이 일이 이젠 색을 덧칠하는 “동영상 포토샵”에 그치지 않는다며, 지난해 개봉한 전쟁영화 <고지전>의 ‘색보정 전후’ 비교 화면을 스크린에 띄웠다.

“자, 이렇게 화면을 흔드는 ‘셰이킹(shaking) 효과’를 줘서, 대포를 쏠 때 땅이 흔들리거나, 인물의 정서불안을 표현할 수 있죠. 화면의 일부만 확대 강조해, 마치 카메라가 그 장면을 ‘줌인 촬영’한 듯한 효과도 주죠.”

영화마다 대표적인 색감을 주는데, “어두운 이면을 다룬 <돈의 맛>은 무채색 계열로 밝지 않게 만들었고, <후궁>에선 욕망의 분위기가 살아나도록 화면 전체에 붉은 계열의 색을 쓰는 장면에서 다른 잡색이 끼지 않게 조절했다”고 한다.

“이 일은 ‘1+1=2’ 같은 정답이 없죠. 최종 버전을 도출하려고 작업하고 버리기를 수없이 반복해요.”

그는 극장으로 넘기기 직전, 영화 전체를 최종적으로 매만진다.

“그래서 제작사와 계약할 때, 영상이 유출되면 피해보상을 한다는 서명까지 하죠.”

진범이 잡혔지만, 최근 <건축학개론> 불법파일이 유출됐을 때 “9시간30분 경찰조사를 받았다”며 웃었다. 영화 전체 컷을 미리 보는 극소수 스태프여서 “흥행할 것 같아?” “얼마나 야한데?”란 물음도 종종 받는다.

“스태프 노고를 아니까, 대체로 긍정적인 표현으로 얘기해줘요. <도둑들>처럼 영화가 괜찮을 땐 서슴없이 ‘잘 나왔다’고 말해주고요.”

박진호씨는 스마트폰을 이용해 색보정을 설명했다. 영화 관계자들에게 이렇게 직접 보여주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라 했다. “채도가 너무 높으면 영화를 해치고, 너무 낮으면 매가리가 없어서 그 사이를 잘 찾아야 해요. 정답은 없어요. 만족할 때까지.”
푸릇한 느낌의 ‘은교’는 녹색을
욕망 드러나는 ‘후궁’은 붉은색
화제의 흥행작들 그의 손 거쳐
“화면 색보정은 정답 없는 작업
칠하고 지우기 수없이 반복하죠”

기독교교육학을 전공하다 신학대를 그만둔 그는 “영상에 매력을 느껴” 방송사 아카데미에서 컴퓨터그래픽(CG)을 배웠다. 시지(CG) 일을 하다, 세방현상소에서 2004년부터 디지털 색보정을 시작했다. 영화 100여편에 참여한 그는 “시나리오도 못 보고 작업한 게 허다”했지만, 올해부터 “먼저 시나리오를 주면서, ‘어떤 색이 좋을지 판단해 달라’고 제안받는 상황이 됐다”고 했다.

그는 애로사항과 아쉬움도 슬쩍 토로했다.

“촬영하다 감독과 촬영감독의 사이가 나빠져, 따로따로 와서 화면의 색감을 요구하면 답답할 때도 있지요. 요즘엔 현장에서 빨리 찍고, 후반작업에서 화면을 빨리 (디지털로 수정해) 만지자는 생각 때문에 현장에서 촬영한 미장센(화면 구도와 배치의 미학)이 좀 줄어드는 것도 같아요.”

국내 장편 상업영화의 디지털 색보정을 맡는 사람은 4개 회사 8명이다. 지난해 1월 상상마당으로 스카우트된 그는 최근 활동이 가장 활발하다.

그는 “영화에서 색보정을 한 것이 티 나지 않고, 관객들이 잔잔하게 흘러가듯이 영화를 보게 하는 것이 바람”이라고 했다.

어떤 영화의 파스텔톤이 당신에게 문득 아련함을 던져줬다면, 색감과 어우러진 영화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면, 빠르게 흐

르는 엔딩크레디트를 한번 보시라. 지하공간에서 색으로 감정을 심은, 또다른 연기자 ‘박진호’의 이름이 스쳐 지나갈 것이다.

글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사진·영상 조소영 피디 azu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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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송 기자·조 피디의 엔딩크레디트 ‘세 줄 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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