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2.08.16 20:21 수정 : 2012.09.14 15:57

“쓰레기장이죠, 쓰레기장. 하지만 이게 없으면 소리를 못 내고, 밥벌이도 못하니까 정말 소중해서 하나도 못 버려요.” 폴리아티스트 안기성씨가 녹음실 한쪽에서 문고리로 총소리를 만들며 웃는다.

만물 고물상 같은 녹음실
휴대용주사기 마개 돌려
김혜수 금고 다이얼 돌리는 소리…
욕조에 물 채워 팔 휘저어
전지현 수영하는 소리…
아내가 말했다 “당신 대단한데”

영화 ‘도둑들’ 폴리아티스트 안기성씨

270㎜ 크기의 발을 날렵하게 빠진 하이힐에 구겨넣었다. “하이힐이 작으면 이렇게 신발 뒤축을 찢어서 신어요.” 길에서 주워온 대리석에 올라가 또각또각 소리가 나게 제자리걸음을 했다. “영화 <도둑들> 도입부에 전지현씨가 신하균씨의 사무실로 가는 걸음소리가 제가 걷는 소리죠.”

그는 당뇨병 환자들이 쓰는 휴대용 인슐린 주사기 끄트머리 마개 부분을 돌렸다. 딸깍딸깍 소리가 흘렀다. “<도둑들>에서 김혜수씨가 보석을 훔치려고 금고 다이얼을 돌리는 소리예요.” 전화기·숟가락통·쇠붙이를 모아놓고 젓가락으로 드럼 치듯 두들겼다. ‘땡’, ‘핑’ 소리가 났다. “<도둑들> 후반부에 김윤석씨가 아파트 외벽에서 줄타기 액션을 할 때 총알들이 벽에서 튀는 소리”라고 했다.

팔목에 입술을 대고 ‘쭈~욱’ 소리를 내더니, “이 팔목에서 김수현씨의 키스 소리가 나왔다”며 웃었다. “‘런다화’(임달화)가 피를 쏟는 소리는 생닭을 주무른 거고요. 영화 막판 전지현씨가 수영하는 소리는 여기 욕조에 물을 채워서 팔을 휘저어 만들었죠.” 이번엔 손가락 부분이 뚫린 목장갑을 꼈다. 장갑 뚫린 곳에 개 발톱처럼 뾰족한 볼펜 심을 끼워 개가 걷는 시늉을 했다. “지난해 개봉한 <블라인드>에서 ‘안내견’이 걷는 소리를 내려고 만든 방법이죠.” 다시 지푸라기를 집어서 흔들더니, “어떤 애니메이션에 들어간 나비 날갯짓 소리인데, 딱정벌레와 장수풍뎅이가 싸우는 소리 등 곤충들 소리가 참 힘들다”고 떠올렸다.

13일 경기도 남양주 영화촬영소 녹음실에서 만난 안기성(32)씨는 ‘전지현’이 되기도 하고, ‘나비랑 딱정벌레’로도 변하는 소리의 마술사 ‘폴리 아티스트’다. 영화에서 대사와 음악을 제외하고 촬영현장에서 잡아내지 못한 소리와 효과음을 도구와 몸을 이용해 만든다. 사운드 관련 스태프 중 아티스트(예술가)란 직함이 유일하게 붙는다.

“전쟁영화 <포화 속으로>에선 흙이 깔린 녹음실 바닥에서 군장 메고 직접 걸어서 녹음했죠. 맞아 쓰러지는 장면에선 바닥에 직접 넘어지기도 하고요. 체력이 있어야 이 일을 해요. 배우처럼 감정을 실어 다시 연기하는 거죠.”

녹음실은 차라리 만물 고물상 같았다. 흙, 돌, 낡은 자전거, 의자, 자동차 문짝, 다리미, 고장난 시계 따위 소품들이 어지럽게 뒹굴었다. 폐차장, 고물상, 아파트 분리 수거장에서 가져온 물건들도 수두룩하다.

“쓰레기라고 하겠지만 우리에겐 보물이죠. 의자가 삐걱거리면 버리는데, 우리에겐 그게 소중한 소리죠. 얘네들을 버리지도 못해요. 언제 어떻게 쓰일지 모르니까.”

쓰레기 더미 옆에 특이한 물건이 있으면 “반드시 만져보고 소리를 내봐야”하는 직업병 탓에 아내와 연애할 때 “(쓰레기 쪽으로) 가지 말라”는 말도 여러 번 들었다고 한다.

대학에서 체육학과를 다니다, 음향제작과로 바꾼 그는 “내 손과 몸에서 나온 소리에 관객이 반응하는 희열” 때문에 2006년부터 이 일을 시작했다. 전문 교육 과정이 딱히 없어, 1970년대부터 이 일을 해온 양대호씨 밑에서 3년 동안 배운 뒤 프리랜서가 됐다.

“처음엔 서울 명동에 가서 사람들 다리를 보고 발 맞추는 소리 연습도 했어요. 그런 뒤 어깨 움직임만 보고 발을 맞춰보죠. 영화에서 배우가 걸을 때 상체만 나오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일을 할수록 발소리가 제일 힘들어요. 사람의 감정·무게에 따라 발소리도 달라야 하거든요.”

그는 <화차> <범죄와의 전쟁> <후궁> <연가시> <도둑들> 등 120편에 이름을 올렸다. 방송 다큐멘터리 <남극의 눈물>에서 펭귄이 미끄러지고, 부딪히는 소리 등도 그의 작품이다. 그를 포함한 프리랜서 3명이 한국영화의 70~80%를 담당한다. 미국은 발소리 전문 등 일이 세분화되어 있고 사운드 스태프에 대한 대우가 좋아, <다크 나이트 라이즈>엔 나이 육십이 넘은 폴리아티스트도 참여했다. 그는 “우린 보수가 또래 직장인보다 낮고, 적은 인력으로 일주일에서 열흘 동안 바삐 녹음해야 한다”며 안타까워했다.

“어떤 분은 화면을 보면서 쇠붙이를 부딪혀 소리를 내다가 손가락 뼈가 으스러졌죠. 산재보험이 적용되는 직업도 아니어서, 그럴 땐 가슴이 아파요. 많은 사람이 우리 일을 잘 모르니까요.”

“고향 제주에 폴리 녹음실을 만들고 싶다”는 그는 가끔 아내와 소리가 입혀지기 전과 후의 영화를 같이 본다고 한다. “사운드 힘이 이런 거구나. 당신 대단한데.” 소리를 직접 빚어내는 이 남자도 아내가 해준 이 말을 가장 ‘고마운 소리’로 기억했다.

남양주/글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영상·사진 조소영 피디 azuri@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송 기자·조 피디의 엔딩크레디트 ‘세 줄 밑’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