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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10.17 20:14 수정 : 2012.10.17 20:14

이병천 강원대 경제학과 교수

‘유신 40돌’ 유신체제를 다시 생각한다 ③

과거와 현재가 대화하는 방식은 단순하지 않다. 그러나 이 땅의 주류가 과거와 대화하는 방식은 이른바 ‘기승전결 진화론’이다. 일제강점기 친일을 했던 실력이 대한민국 ‘건국’의 자산이 되었고 또 식민지배 덕분에 이미 근대 경제성장이 본격화되어 독립 뒤 산업화 성공으로 이어졌으며, 산업화 덕분에 정치적 민주화가 가능했다는 식이다.

이 해석대로라면 1972년 시작된 박정희 유신체제를 통한 중화학공업화와 압축성장 덕분에 비로소 정치적 민주화도 가능했다는 논리가 도출된다. 성찰력이 결여된 일차원적 진화주의와 경제주의는 유신독재 시기의 인식에서도 경제성장 가치를 제일로 놓아 민주화의 가치를 주변화시키고 뒤를 이은 5공화국 독재 또한 정당화시켜주는 결과를 낳게 된다. 아버지 박정희의 명예회복을 내건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쪽의 한 측근은 유신체제가 수출 100억달러를 넘기 위한 조치였고 유신이 없었으면 100억달러를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1인 종신독재를 정당화하는 성장물신주의를 가감 없이 드러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유신체제에서 ‘유신경제’는 어떤 성격을 가졌던가. 유신독재가 새누리당 등 현재의 집권세력과 기득권층에 과거사의 부채로 남아 있다면, 유신경제는 오로지 자산만 남겨준 것일까? 유신독재의 정치·사회적 야만뿐만 아니라 경제적 유산에 대해서도 여당을 비롯한 현재의 보수 세력들은 겸허하게 성찰하고 공정한 평가를 받을 자세를 보여야 국민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10억달러 수출을 100억달러로 올린 것 자체는 좋은 일이다. 분명 보수세력에 유신경제는 자산이며 그렇게 인정해야 할 대목도 있다. 특히 방위산업 생산의 주체를 군 공장이 아니라 민수기업이 겸하게 한 것은 효율적인 기획이었다고 생각된다. 나아가 유신경제 내부를 들여다보면, 고도성장을 가능케 한 국가주도형의 ‘조절된 시장경제’ 요소들이 있었다. 주요 기간산업을 우선 육성하는 선별적인 산업정책 및 금융 통제, 그리고 기업의 고투자가 서로 연계된 것, 수출 실적으로 대표되는 성과 규율을 국가가 강제한 것, 무분별한 개방이 아니라 개방과 국내시장 보호를 결합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런 조절된 시장경제 기조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를 지배한 ‘줄푸세’(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풀고, 법질서는 세움) 정책과는 대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70년대 초 한국이 비상체제로 역주행하지 않고 정상적 방법으로 관리된 시장경제 기반 위에 산업고도화의 길로 나갈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71년에 압축 산업화가 초래한 불균형과 사회경제적 갈등을 고려해 성장·안정·균형의 조화를 지향하는 3차 5개년 계획이 공포됐고, 이를 상황 변화에 맞게 수정, 보완하는 방법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71년 대선에서 야당의 김대중 후보는 한반도평화·민주주의와 동행하는 방식으로 국민경제 균형발전과 경제민주화를 뼈대로 한 대중경제 방안을 제시하고 있었다.

1970년대 초는 미-중 수교와 월남전 종식 등에 따라 세계적으로 탈냉전의 새 물결이 일어났고 한반도 안보 상황도 남북대화가 진행되는 등 유리한 기류가 나타났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저버리고 박정희 정권은 당대 탈냉전·민주화·균형발전의 시대정신을 거슬러 갔다. 청와대의 자의적인 전횡권과 재벌 독점, 노동기본권 억압, 중소기업 배제 등을 앞세운 돌진적 동원경제 모델은 엄청난 무리와 국민적 희생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가는 1979~80년 외채상환 압박, 물가상승, 과잉중복투자를 동반한 경제위기와 박정희의 죽음, 그리고 유신독재의 재판이라 할 5공 독재 아래 재벌 퍼주기 및 비용사회화를 동반한 구조조정 정책으로 치러야 했다.

한국 경제가 돌진적인 중화학공업화의 늪에서 헤어난 것은 5공 독재를 밀어준 미·일 보수정권의 연합지원, 80년대 중엽 3저 호황이라는 대외적 변수가 결정적 요인이었다. 그리고 재벌의 힘을 더 강화하고, 반대로 노동자, 서민 대중에는 일방적 희생을 강요한 구조조정 정책 덕분이었다. 유신경제를 관통하는 종신독재와 재벌 지배연합, 비용사회화와 이익재벌화, 선성장-후분배주의는 우리 사회의 파행적 양극화와 이중구조적 불균형을 심화시키고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국민통합의 길에 덫을 놓는 원죄를 범했다. 오늘의 재벌공화국과 국민 분열상은 유신경제체제에 그 뿌리가 있다. 그 유산의 극복과 국민통합의 길은 줄푸세의 무늬만 바꾼 경제민주화로는 불가능하다.

이병천 강원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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