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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전 상지대 총장·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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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40돌’ 유신체제를 다시 생각한다 ④
혈서 쓰고 일본군 편 섰던 이가한국군 장교 돼 민주정권 탈취
일제의 불법지배 따지지도 않고
미국 요구에 떠밀려 국교 재개 지하에 묻힌 광복운동 선열들이
아마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광복군의 적이었던 일본 제국주의 괴뢰 만주군의 장교였다. 해방 뒤에는 한국군의 장교가 되어 4·19 ‘혁명’으로 성립된 민주정권을 하룻밤 사이에 뒤엎고 그 통치권을 탈취했다. 이 군사쿠데타의 주역인 박정희 소장은 군복을 벗고 민정으로 복귀한다고 실시한 1963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를 겨우 이겨 정권을 유지했다. 1971년에도 야당 후보를 또 겨우 이겨 정권을 유지하더니 1972년에 난데없이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는 뒤이어 ‘유신’이란 것을 강행했다. 유신이란 본래 역사를 새롭게 전진시킨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내려 국회를 해산하고 대학을 폐쇄하고 온 나라를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으면서 ‘유신’한다고 했다. 그러고는 ‘유신’ 세력이 선정한 유권자들만이 체육관에 모여 박정희를 임기 5년의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국회의원 3분의 1을 ‘유신’ 대통령이 임명했다. 임기 5년이라 했지만 이른바 체육관 선거를 통한 사실상의 종신집권 체제를 수립한 것이다. 비록 한때의 실수와 불운으로 근래 반세기 동안이나 남의 강제지배를 받기는 했지만 오랜 문화민족 사회에서, 혈서를 써서 자발적으로 침략군의 편에 섰던 인물이 해방된 이 땅에서 쿠데타로 종신집권을 꾀하고 강행한 것이 이른바 ‘유신’이란 것이었다. 일제강점기를 통해 독립투쟁에 몸 바쳤던 선열들은 해방 후의 조국이 남북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싸우리라고는, 더구나 자신들의 적이었던 일본군이나 그 괴뢰 만주국 군에 몸담았던 자가 해방된 조국에서 정권을 탈취해 독재를 하는 상황이 되리라고는 그야말로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광복운동 선열들이 목숨 바쳐 되찾은 조국 땅이 남북으로 나뉘어 싸우고, 그 위에 적의 편에 섰던 자들이 해방된 이 땅에서 정권을 강탈해서 독재정치를 하다니, 선열들은 아마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해방 후의 우리 민족사회가,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괴뢰 만주군 장교 출신 박정희의 정권이 광복 운동에 목숨을 바친 선열들에게 지은 역사적 죄가 또 있다. 우리 남녘 정부가 미국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지난날의 침략자였던 일본과 국교를 재개한 것이 바로 박정희 정권 때였다. 일본과의 국교를 재개함에 있어서 가장 요긴한 문제는 일본 제국주의의 반세기에 걸친 우리 땅에 대한 지배가 강제지배였고, 따라서 일제 조선총독부의 통치가 불법적인 행위였음을 밝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조선총독부의 우리 땅에 대한 통치를 합법적인 행위로 인정하면, 일제의 강점에 대한 우리 민족의 저항이, 즉 우리의 독립운동이 합법적 통치에 저항한 불법적인 행위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이 일본의 강제지배에서 해방된 우리와 일본 사이의 국교를 재개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우리 땅에 대한 지배가 불법적이라는 사실을 따져 밝히지 못함으로써, 우리 광복운동 선열들의 독립운동을 일제의 합법적 통치에 대해 저지른 불법적 행위가 되게 하고 만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만주군 장교 출신 박정희 정권의 반역사성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고도 남을 만하다. 2010년에 한·일 두 나라의 양심세력이 ‘합방’조약 무효를 선언했지만, 진정한 우호 관계 수립을 위해서는 두 나라 정부가 함께 풀어야 할 일이다. 광복군 출신으로 박정희 정권과 맞섰던 장준하의 죽음이 최근 다시 문제가 되고 있지만, 박정희와 동년배인 장준하·김준엽 등은 일제의 학도병으로 중국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목숨을 걸고 탈출해서 우리 광복군이 되었다. 우리의 적이었던 일제의 만주국 장교로서 침략 전쟁에 가담했으면서도 해방된 조국에서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해서 ‘유신’ 독재를 자행하는 박정희 정권을 장준하는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그것이 그의 죽음과 연결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는 정직하며 그래서 진실은 기어이 밝혀지게 마련이다. 강만길/전 상지대 총장·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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