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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한 구두공장에서 일하는 이아무개(62)씨가 13일 오전 고소리(펜치의 변형 도구)로 구두 가죽의 바닥면을 고정시키고 있다. 이씨가 39년째 쓰고 있는 이 집게는 그의 또다른 손이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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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켤레당 공임 500원 도둑맞아” 39년차 구두장이의 분노
[2013기획 격차사회를 넘어] 밀려난 삶의 공간 ⑦성수동 구두공장
<한겨레>가 신년기획 ‘격차사회를 넘어서’를 시작하며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 사회에서 격차가 가장 심각한 분야가 어디냐는 물음에 국민들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를 첫손가락(23.6%)에 꼽았다. ‘부동산과 자산의 양극화’(17.7%)나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격차’(14.6%)는 2·3위로 밀렸다. 이는 노동자 열에 아홉은 중소기업에 다니는 상황에서 대기업과의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는 데 따른 위기의식을 반영한 결과로 해석된다. ‘격차사회를 넘어서’ 7회는 대기업의 각종 불공정 관행에 시달리며 밀려나는 삶의 공간인 서울 성수동 구두공장을 찾았다.
원청의 횡포4만원에 납품받아 27만원에 팔며
브랜드업체, 툭하면 하청 쥐어짜
현금결제 대신 어음지급이 관행
구두상품권 강제로 떠넘기기도 처음 맡는 구두공장의 본드 냄새는 달다. 중독성이 강하다. 강한 후각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팍~팍’ 하는 공기압축 ‘태커’ 소리와 ‘툭~툭’ 하는 구두망치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39년차 ‘구두쟁이’ 이아무개(62)씨는 4일 오전 서울 성수동의 한 건물 2층 구두공장 한켠에 앉아, 아래쪽에 혹이 달린 모양의 구두집게를 들고 본드 칠을 한 여성용 구두의 가죽을 중간 밑창 아래쪽으로 힘껏 잡아당기고 있었다. ‘라스트’라고 부르는 발 모양의 플라스틱 틀 바닥에 임시로 붙여 놓은 창에 발등과 옆을 감싸는 가죽을 붙이는 공정이다. 가죽이 중창에 잘 붙도록 태커 핀을 40여개 박아 고정한 뒤 나중에 본드가 마르면 핀을 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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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동 구두공장 60%가량이 하청
업체는 월급대신 개수당 임금 주고
4대보험 피하려 ‘개인사업자’ 강요
퇴직금도 없고 ‘산재’ 처리도 안돼 ■ 구두공장에 볕 들던 날 이날 오후 이씨는 접착 부위가 잘 마른 구두에서 태커 핀을 빼더니 중창 아랫부분에 붙은 가죽을 구두칼로 깔끔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능수능란한 손놀림이다. “예전엔 구두 세계에 발 들인 ‘하 견습생’이 맨 처음 하는 일이 숫돌에 칼 가는 거였어.” 그가 1968년 서울 ㅅ고 2학년 때 퇴학당한 건 칼이 아니라 주먹 때문이었다. 동네 건달과 3시간여에 걸친 전설적인 주먹싸움을 벌인 게 계기가 됐다. 그러다 1974년 무렵 명동 구두공방에서 구두칼을 갈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선생’이라고 불리는 최고 전문가가 상·중·하 견습생 3명씩 데리고 1개 팀이 돼 이 공장 저 공장 다니며 일을 했다. 일본식 도제 시스템이다. 선생만 돼도 대기업 부장 월급이 부럽지 않았기에 너도나도 구두 기술을 배우려 했다. 노동자가 아니라 장인이라는 의식이 확고했다. 기술이 좋았던 이씨는 남들보다 서너배는 빨리 6달 만에 하 견습생에서 상 견습생이 됐다. 입문한 지 6년째 되던 1980년 즈음에는 자신의 선생이던 조정호 선생이 불러 “내일부터는 너도 선생을 하라”며 일제 구두망치와 집게 세트를 선물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퇴근길에 그는 군인들의 검문에 걸렸다. “전과가 많으시네요.” 전두환 장군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무언가 순화할 게 있다며 영장도 없이 군인들에 의해 끌려간 곳이 나중에 알고 보니 삼청교육대였다. 전과 때문에 군대도 못 간 그는 그곳에서 3주 동안 유격훈련을 하면서 “어마어마하게, 눈만 뜨면, 평생 맞을 걸 거기서 다 맞았다.” 어느 날 아침엔가 담 넘어 도망하다 걸려 사살당한 주검 5구를 연병장에서 본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곳에서 풀려난 뒤 구두공장에 다니다가도 군인만 보면 도망쳤다. 80년대 중반 명동과 퇴계로, 회현동 등에 흩어져 있던 구두공장들이 염천교 부근에 모여들었다. 일일이 망치로 두들겨 박던 구두용 못을 태커가 대체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예전엔 구두쟁이들이 직접 칼로 깎던 중창과 밑창, 깔창, 뒷굽은 프레스 기계가 찍어냈다. 중·하 견습생이 하던 일들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조금씩 조립공이 돼 갔다. 도제 시스템도 서서히 붕괴했다. 90년대 중반 들어 구두 공장의 중심지가 땅값 싼 성수동으로 몰려들 즈음 값싼 중국산 구두도 동시에 한국 시장으로 쇄도했다. 가격경쟁에서 밀렸다. 시장에 자신의 브랜드로 직접 내다 팔기 어려워진 공장들은 점차 대형 브랜드 업체의 하청업체로 전락했다. 이씨는 7년여 전부터 중국 광저우에서 구두공장을 직접 운영하다 2년이 채 못 돼 돌아왔다. 성수동에 본인의 업체를 차려 유명 브랜드인 ㅍ사 하청업체를 했는데, 대금을 1억7000여만원까지 밀린 꼴을 참다 못해 명동 본사에 쳐들어가 주먹으로 해결을 본 뒤 업체를 접었다. 그는 구두집게와 망치를 다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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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의 한 구두공장에서 직원들이 갑피 작업이 끝난 구두 윗부분 가죽을 바닥면에 고정시키는 저부공정 작업을 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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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싼 중국산 밀려들며 점차 쇠락
“원산지 표시만 지켜도 경쟁할 만”
중소업체·기능공들 협동조합 구성
“공동 생산하고 직판장 내는게 목표” ■ 장인이냐, 노동자냐 “월급제 하면 나도 좋지. 일감이 없어도 월급은 나오니까.” 정성 들여 구두 중창에 밑창과 굽을 달던 이씨가 말했다. 제작 공정이 조립식으로 바뀌고 일감도 일정하지 않은데다 급여도 예전만 못하다 보니 성수동 장인들 사이에는 노동자 의식도 새록새록 싹트고 있다. 개수임금제 대신 월급제를 희망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현재 이들은 모두 개인도급업자 취급을 받는다. 업체 사장들은 이들에게 개인사업자로 등록하라고 요구한다.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까닭에 이들은 일정한 퇴직금도 못 받고, 일하다 다쳐도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한다. 4대 보험에 가입한 이들은 관리직원뿐이다. 기능공은 노후 생계 대책도 개인이 해결해야 한다. 50여명이 일하는 인근 ㅁ공장에서 저부 공정 기능공으로 일하는 김아무개(52)씨는 업체 사장의 개인사업자 등록 요구를 계속 거절하고 있다. 지난달 31일 공장에서 만난 김씨는 “이 업체에서 5년째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데 우리 사장은 나보고 계속 사업자등록을 내라고 그래.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냐고. 이 업계의 브랜드 업체들이 직영하는 공장들도 다 마찬가지야. 원청처럼 있는 놈들이 맨날 약자들 것만 빼먹잖아.” 그의 옆에서 일하는 이아무개(53)씨의 생각도 김씨와 같다. 1년의 절반에 해당하는 성수기 때는 400만원 안팎 벌다가도 지난달처럼 비수기 때는 170만원을 받았다는 이 36년차 노동자는 “4대 보험 이런 것 피하려고 우리에게 사업자등록 하라는 거야. 잘못됐다고 생각해. 우린 성과급제 노동자야”라고 힘주어 말했다. 지난달 31일 저녁 성수동의 어느 허름한 호프집에서 ㅁ업체 노동자들과 모임 도중 우연히 만난 정아무개(57)씨는 지난달 초 다니던 공장의 ‘묻지마 폐업’에 분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3일 시무식 제대로 하고서는 다음날 관리자가 기능공 5명을 모아 놓고는 공장 문을 닫겠다는 거야. 일하는 사람을 우습게 아는 거지. 우리가 머슴도 아니고. 내가 어이가 없잖아. 반드시 법적으로 문제를 삼고 말 거야.” 정씨가 씩씩대며 말했다. 여러 조건을 놓고 보면 이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할 근거는 충분하다. 노동법상 개인 도급은 사실상 위장 도급에 해당할 가능성이 크다. 우선 도급업체로서 이들은 별도의 자본을 갖고 있지 않아 업체로서의 실체가 불분명하다. 출퇴근 시간은 일정치 않지만, 같은 공장에 매일 출퇴근하고 업주가 마련한 자리에서 상시적인 근로감독을 받으며 일을 한다. 실수가 발생하면 업주가 직접 수정을 지시한다. 서울일반노동조합 제화지부의 정기만 지부장은 “기능공의 노동자성을 인정하고 노동조건 등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에 나서지 않는 한 성수동 제화업체들이 더이상 활성화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진단했다. 성수동 구두공장 사장들도 그 필요성을 인정한다. <한겨레>가 업체 30곳을 대상으로 물은 결과를 보면, 인력수급난을 해결할 대책으로 ‘기능공의 노동자 인정과 4대 보험 가입 등 복지 확대’를 첫손가락에 꼽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 2013기획 격차사회를 넘어 기획연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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