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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중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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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중혁의 메이드 인 공장 ⑧ 엘피 레코드 공장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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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에서 계속
만들어야 할 제품이라면
우선 고민해야 할 것이 있다
2013년 지금,
엘피로 정확히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엘피 공장에 가서 그걸 묻고 싶었다 인간의 시간은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뭔가 대단한 구분이 나올 거라 기대하겠지만, 김빠지게) 과거, 현재, 미래다. 그러고 보면 삶은 참 간단하다. 과거를 지나온 우리는 현재에서 살다가 곧 다가올 미래를 살아가면 된다. 참, 쉽다. 걱정할 게 뭐 있어, 간단하네. 막상 살아보면 그게 간단치가 않다. 시간은 뒤죽박죽이다. 현재를 살고 있는데 불쑥 과거의 어떤 일이 우리 앞길을 가로막고 괴롭히는가 하면, 미래의 어떤 일들 때문에 현재를 마음껏 누릴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과거의 시간 속에서만 살아가는 병에 걸리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미래에서 온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 살아가기도 한다. 과거의 일에 괘념치 않고, 현재에 불안하지 않으며, 다가올 미래에 대해 염려치 않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우리 모두 안다. 사람의 성향 역시 세 가지 시간과 연결돼 있다. 좋았던 시절을 추억하면서 그 시절이 계속 반복되길 바라는 사람이 있고, 오로지 현재의 감각에 집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데 쏟는 사람도 있다. 어떤 게 좋고, 어떤 게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그건 시간에 대한 각자의 태도이고, 삶을 살아나가는 각자의 방식이다. 아마도 가장 안정적으로 보이는 사람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적절하게 이용하는 사람이 아닐까. 과거를 참고하면서 현재에 충실하되 미래를 적당히 준비하는 사람. 내 경우엔 도무지 균형이 맞질 않는다. 과거는 쉽게 잊으며, 미래는 (어차피 예측하기 힘드니) 거들떠보지 않고, 주로 현재에만 집중하는 편이다. 경험을 발판 삼아 소설을 쓰고 오래전 기억들을 되살려 에세이라도 써야 하니 그나마 이 정도라도 기억하지, 다른 일을 했더라면 아마 모든 걸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뭔가 새로운 걸 받아들이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다. 새로운 걸 쉽게 이해하지만 일단 조금이라도 과거의 것이 되고 나면 금방 잊어버린다. 사람, 참 간사하다. 집에 쌓여 있는 엘피(LP) 레코드를 볼 때마다 이런 복잡한 심정이 자주 반복되곤 했다. 그런데, 이런, 엘피 공장에 가게 됐다. 시간의 복잡한 흐름을 엘피 레코드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물건은 없을 것 같다. 엘피 레코드는 잊지 못할 추억이고 좋았던 시절의 증거품이지만 지나치게 부피가 큰 과거의 물건이기도 하다. 공간의 효율을 위해 엘피보다 훨씬 작은 시디(CD)가 등장했고, 이제는 시디마저 크다고 느꼈는지 눈에도 잘 보이지 않는 파일의 형태로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러다 언젠가는 텔레파시로 음악을 듣게 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다.(음, 텔레파시로 듣는 음악이 궁금하긴 하다. 전 고음질 텔레파시로 쏴주세요!) 엘피에서 파일로 넘어온 지금, 편해진 건 확실하다. ‘엘피판’이 뭔지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의외로 이런 분들이 많다고 한다) 잠깐 설명. 예전엔 엘피를 들으려면 경건한 의식을 치러야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에서 ‘판’을 빼낸 다음 클리너로 ‘판’의 표면을 닦아주고, 턴테이블 뚜껑 열고, ‘판’을 살포시 얹은 다음, 카트리지를 조심스럽게 걸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제, 음악 감상. 에이(A)면을 다 듣고 나면 다시 턴테이블로 가서 ‘판’을 뒤집어 비(B)면이 위로 오게 만들어야 한다. 귀찮다. 솔직히 예전에도 귀찮았고,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귀찮았을까 싶다. 지금은 간단하다. 시디도 간단하지만 파일은 더 간단하다. 다운로드 누르면 몇 초 만에 내 귀로 음악이 배달된다. 엘피 공장으로 가기 전, 가장 큰 걱정은 ‘엘피는 추억이며, 엘피는 향수다’라는 하나 마나 한 얘기를 하게 될까봐, 집에 있는 엘피의 무게를 이기지도 못하는 내가 ‘엘피야말로 음악을 듣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는 거짓 깨달음을 전파할까봐였다. 물론 엘피로만 느낄 수 있는 감흥이 있다. 이제 와서 우리가 엘피의 단점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실은 엘피만의 감흥이었다. 엘피는 무척 크다. 이제는 부피가 너무 커서 보관하기 힘들다고 말하지만 무척 컸기 때문에 재킷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었다. 에이면을 다 듣고 나서 비면을 들으려면 뒤집어야 했다. 그 때문에 음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엘피에는 고유한 잡음이 있다. 시디에서 들리는 음악 소리가 훨씬 더 깨끗하다고 생각하지만, 엘피에는 엘피만의 고유한 소리가 있었다. 시간은 장점을 단점으로 바꾼다. 혹은 장점이었던 것을 단점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엘피는 반시대적이다. 일단 그것부터 인정해야 한다. 너무 크고, 너무 번거롭다. 음질도 깨끗하지 못하고, 관리하기도 쉽지 않으며, 무엇보다 공간의 제약이 크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아날로그 최고!’라고 외치기만 하는 건 공허하다. 휴대전화나 휴대용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는 사람에게 ‘음악을 무시하는 일’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것 역시 ‘음악을 무시하는 일’이다. 엘피가 살아남아야 할 가치가 있는 미디어라면, 공장을 가동시켜 계속 만들어야 할 제품이라면, 우선 고민해야 할 것이 있다. 2013년 지금, 엘피로 정확히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엘피 공장에 가서 그걸 묻고 싶었다. ‘엘피 팩토리’의 이길용 대표(이번엔 공장 이름, 대표 이름을 밝히겠다. 엘피 공장은 국내에 하나밖에 없으니까)는 역시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복고의 유행’에 편승해 ‘판’이나 팔아먹으려는 현실적인 사람이 아니었으며, 오래전 음악을 복원해내겠다는 일념으로 과거의 좋았던 시절을 무작정 회고하는 사람 역시 아니었으며, 앞으로 엘피의 시대가 반드시 돌아오리라는, 대책없는 희망으로 사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 세 가지 시간 감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세 가지 시간으로부터 독립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엘피 팩토리’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보기 좋게 믹스돼 있었다. 엘피 공장을 찾아갔을 때 그곳에선 마침 두 장의 음반 작업을 하고 있었다.(‘레코드 페어’ 행사 때문에 만들고 있던 음반들을 제외하면 그렇다.) 한 장은 결과물이 막 나온 상태였고, 한 장은 밤새 공장을 가동시키며 찍어내고 있는 상태였다. 한 장은 한국 음악의 위대한 과거라고 부를 수 있는 가수의 음반이었고, 또 한 장은 한국 음악의 현재이자 미래라고 부를 수 있을 아이돌의 음반이었다. 한 장은 음악이 무척 중요한, 그래서 미국과 독일에서 마스터링하고 원판을 깎아온 엘피였고, 또 한 장은 이길용 대표와 음반회사가 오랫동안 공을 들여 만들어낸, 아이돌의 얼굴이 엘피에 인쇄돼 나오는 ‘픽처디스크’였다. 두 장의 엘피를 만드는 과정에 대해 말하면서 이길용 대표는 커다란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꿈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 취재에 협조해주신 ‘엘피 팩토리’에 감사드립니다. 김중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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