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레이션 김중혁
|
[매거진 esc] 김중혁의 메이드 인 공장 ⑨ 엘피 레코드 공장 (중)
|
지난 4월까지 4500장 생산했고
벌어들인 수익은
놀라지 마시라 자그마치
200만원이다 미래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어서, 근거 없는 낙관으로 가득 채울 수도 있고, 보이는 곳 전체를 잿빛 비관으로 도배할 수도 있다. 미래를 낙관하는 사람은 현재를 넘어설 수 있고, 미래를 비관하는 사람은 현재를 더욱 꼼꼼하게 채워간다. 미래란 현재의 동력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미래란 현재에서 이어지는 시간이지만, 반드시 현재의 결과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현재에서 준비한 것들이 미래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을 수 있다는 걸 안다. 엘피 팩토리의 이길용 대표는 공장 설립 후 2013년 4월까지 4500장의 엘피를 생산했고, 그로 인해 벌어들인 수익은, 놀라지 마시라 자그마치, 200만원이다. 우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적은 금액이다. 공장의 초기 설비에 들어간 비용이 6억원 정도이고, 경상비와 투자비용을 제외해야 하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수익이 없는 셈이다. 그런데도 꿋꿋하게 엘피를 찍어낸다. 앞으로도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면서, 한 걸음씩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도대체 그는 어떤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어떤 미래를 바라보길래 현재를 이토록 꼼꼼하게 채워 나가고 있는 것일까. 이길용 대표가 엘피 공장을 시작하게 된 데에는 지극히 현실적인 계산도 있었다. 일본에서 정식 유통되고 있는 엘피는 30만장이지만 일본의 연간 엘피 생산량은 20만장이다. 10만장은 미국이나 유럽의 공장을 이용해서 생산하는 것이다. 이길용 대표는 그 10만장에 주목했다. 한국의 공장에서 만든다고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단가가 싼 것은 아니지만 시간과 운송료를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일본의 음반회사가 미국이나 유럽의 공장에다 주문을 하면 대략 45일 정도가 걸린다. 한국의 공장에서 만들면 25일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승산이 있어 보인다. 공장 문을 연 2011년 9월부터 2013년 4월까지 4500장의 엘피를 찍었다고 하지만 공장의 규모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수다. 문의를 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실제 제작까지 이른 경우는 별로 없었다. 기계를 돌리지 못하고 노는 날이 더 많았다. 놀았던 시간에 대해 이길용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공장 문을 열었는데 일도 없고 돈도 못 벌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기술력이 일취월장합니다.” 이런 초긍정주의자 같으니라고! 하긴, 그럴 법도 하다. 인간의 모든 기술은 잉여 노동력으로 발전한 것이고, 할 일이 없어서 새로운 발명을 하게 된 경우도 많으니까 말이다. (지난 회에 말한) 두 장의 음반 작업을 하면서 기술력이 일취월장하기도 했다. 한국 음악의 위대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 조용필과 지드래곤의 엘피 작업이었다. 두 뮤지션의 엘피는 정반대의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조용필의 19집 <헬로> 엘피는 헤비웨이트(Heavy Weight)로 제작됐다. 일반적인 엘피의 무게가 120그램 정도인 데 비해 헤비웨이트 엘피는 180그램이 넘는다. 무겁기 때문에 재료가 많이 들어가고 제작 단가도 높아질 수밖에 없지만, 판이 휠 확률도 적고 안정성이 높아진다. 오랫동안 보관하기에도 좋다. 음악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오랫동안 남을 엘피를 제작하려는 이길용 대표의 마음이 담긴 엘피다. 반면에 지드래곤의 엘피는 ‘픽처 디스크’, 즉 그림이 인쇄된 엘피다. 하얀색 엘피에 지드래곤의 모습이 선명하게 새겨진 ‘픽처 디스크’는, 우선 보기에 무척 아름답다. 턴테이블에 얹는 대신 벽에 걸어두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일반적인 픽처 디스크와 다른, 새로운 걸 만들기 위해 50여가지의 패턴을 실험했고, 그중에서 20여가지를 지드래곤의 소속사인 와이지(YG)엔터테인먼트에 제안했다. 와이지엔터테인먼트는 이길용 대표의 아이디어를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었다. 테스트하고 실험하는 동안 비용은 많이 들었지만, 과정 속에서 얻은 노하우야말로 엘피 팩토리의 큰 자산인 셈이다. 지드래곤의 엘피는 이길용 대표가 바라보고 있는 미래의 모습이기도 하다. 누가 엘피를 살 것인가. 누구에게 엘피를 팔 것인가. 이길용 대표는 해외로 뻗어 나가는 아이돌에게서 답을 찾았다. 아이돌의 해외 공연 수익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기념품 사업이다. 기념품 사업 중 가장 큰 걸림돌이 ‘불법 복제’인데, 엘피는 불법 복제의 가능성이 매우 적다. 일본 도쿄에서 공연한 후 중국 베이징으로 가면 똑같은 기념품을 3분의 1 가격으로 팔고 있지만, 엘피는 그게 불가능하다. 불법으로 복제할 수는 있어도 제대로 된 음악이 나오게 할 수는 없다. 우리가 흔히 ‘백판’이라고 불렀던 불법 엘피처럼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매끈하게 잘생긴 아이돌에 열광하는 팬들이 울퉁불퉁한 ‘백판’을 살 일은 없지 않을까 싶다. 다른 상품과는 달리 엘피는 모으는 맛이 있다. 포스터는 금방 지루해지고, 시디는 너무 작고, 팬시 상품들은 아무래도 품격이 떨어진다. 지드래곤의 엘피는 이미 해외 공연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외국의 유명 아티스트들은 대개 자신의 엘피 한 장 정도는 가지고 있다. 몇 달 동안, 때로는 몇 년 동안 작업한 자신의 노래를 엘피라는 ‘물질’에다 담아보고 싶은 것이다. 너무 빨리 소비되고 너무 빨리 잊혀지는 음악에 대한 안타까움이 엘피를 제작하게 된 이유일 것이다. 엘피로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조금 귀찮고 거추장스럽지만, 누군가 몇달 동안 만들어낸 음악과 정면으로 마주하려면 그 정도 번거로움은 감내해야 하지 않은가, 라는 질문이 엘피 속에 들어 있는 셈이다. 엘피 팩토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문구를 하나만 고르라면, 아마 ‘온고지신’이 아닐까 싶다. ‘옛것을 익히어 새것을 알게 되는 것’, 사라져가는 엘피의 공정을 익히어 그걸 새것으로 탈바꿈시키는 것, 엘피라는 물건의 장점을 새로운 거푸집에 옮겨 담는 것, 그 작업을 지금 엘피 팩토리가 하고 있는 셈이다. 시작할 땐 당연히 어려움이 많았다. 마지막 엘피 공장이 문을 닫은 것이 2004년이었고, 현재 음반사의 이사나 상무도 엘피를 만들어 본 경험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다. 공장에서 일을 했던 사람들이 있지만 기계 시스템이 전혀 다르다보니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예전엔 그런 말이 있었대요. 엔지니어가 전날 술을 많이 마시면, 판이 얇아진다. 대부분 수동 프레싱이었는데, 술을 많이 먹은 날엔 누르는 압력이 달라진다는 거죠. 저희 기계는 최신식입니다. 최신식이라고 해도 1978년산 모델이지만요.” 이길용 대표는 옛 지식 위에다 새로운 실험을 계속했다. 피브이시(PVC) 콤파운드라는 부품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피브이시 배합을 다르게 해보기도 하고, 최적의 라벨 종이를 찾기 위해 수많은 테스트를 했다. ‘온고지신’하기 위해 ‘맨땅에 헤딩’ 하고 있는 셈이다. 이길용 대표는 엘피에 대한 견해차 때문에 답답한 경우가 많다. 많은 음악 전문가들은 엘피의 고결함을 말하지만, 이길용 대표는 엘피가 좀더 대중화되고 좀더 쉽게 들을 수 있는 미디어가 되길 바란다. ‘엘피는 역시 진공관으로 들어야 제맛’이라거나 ‘싸구려 오디오로는 엘피의 진면목을 느낄 수 없다’는 말들이 엘피의 생명력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더 가까운 곳에서 더 간단하게 엘피를 들을 수는 없을까. 이길용 대표가 꿈꾸는 또다른 미래가 하나 더 있다. 그 이야기는 세 번째 회에서 계속. 김중혁 소설가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