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레이션 김중혁
|
[매거진 esc] 김중혁의 메이드 인 공장 ⑩ 엘피 레코드 공장 (하)
|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게 할 것이다
뭐 잊고 사는 건 없는지
한때 진심으로 사랑했던 음악을
무덤덤하게 바라보는 건 아닌지 엘피를 제작하다 보니 이길용 대표가 많이 듣게 되는 질문이 있다. 자주 듣는 ‘베스트 3 질문’은, “미쳤어요?” (안 미쳤어요!) “돈이 돼요?” (지금은 안 돼요!) “턴테이블은 어디 가서 사요?” 자, 지금부터 알려줄게요. 이길용 대표는 비싼 턴테이블과 오디오를 살 필요가 없다고 한다. 집집마다 한 대씩 있던, 우리가 흔히 전축이라고 불렀던 바로 그 오디오들을 황학동에 가면 싸게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런 오디오들로 제대로 된 소리가 나겠냐고, 엘피를 들으려면 좀더 고급한 기기들이 있어야 하지 않냐고 생각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이길용 대표는 머지않아 턴테이블 수입 사업도 병행할 계획이다. 성능 좋은 턴테이블을 싼 가격에 팔고 싶어한다. “젊은 친구들이 엘피를 사 모으게 된 계기가 웃겨요. 좋아하는 뮤지션의 물건들을 컬렉션하다 황학동을 뒤져서 엘피를 샀어요. 그런데 거기 가보니 좋은 엘피가 많은 거예요. 오아시스도 있고, 메탈리카도 있고, 부시도 있고…, 그래서 한 장씩 사 모으는 거죠. 엘피는 여러 장 있는데 정작 턴테이블이 없는 친구들도 많더라고요. 지금 홍대에서 음악을 하는 뮤지션 중에도 엘피를 처음 본다는 친구들이 많아요. 제가 엘피를 들여다보다가 흠, 세 번째 곡을 들을까 하고 카트리지를 올려놓는데 깜짝 놀라더라고요. 그 위치를 어떻게 아냐고요. 중요한 경험 하나가 사라진 거죠.” 엘피의 표면을 들여다보면서 거기 어떤 음악이 들어 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뛰었던 사람으로서, 회전하는 엘피 위에 카트리지를 올려놓는 순간의 숭고함을 아는 사람으로서, 엘피의 경험이 사라진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긴 하다. 공장에서 엘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서도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장의 엘피가 생산되는 순간, 뜨거운 열기와 기계 속에서 음악이 탄생하는 게 기적처럼 보이기도 했다. 엘피는 ‘스탬퍼’를 만드는 ‘메탈 작업’과 소리골을 찍어내는 ‘프레스 작업’으로 나눌 수 있다. 예전 레코드 회사들은 메탈 작업과 프레스 작업을 분리했지만 엘피팩토리는 두가지 작업을 한 공장에서 한다. 어디 맡길 데도 마땅치 않아서 모든 장비를 외국에서 수입해 왔다. 마스터 음판을 니켈 원판에 찍어 ‘스탬퍼’로 만드는 것이 ‘메탈 작업’의 핵심이며 이 스탬퍼를 ‘마더’(Mother)라고도 부른다. 한 장의 마더로 수많은 자식 같은 엘피들을 찍어내는 것이다. 보통 한 장의 마더로 천 장 정도의 ‘자식’을 생산해내지만 엘피팩토리에서는 500회마다 새것으로 교체하기도 한다. “메탈 작업 하는 기계가 ‘전자동 머신’이라고 해서 샀는데, 개뿔, 하나하나 다 수공으로 해야 해요. 하긴 예전에는 용액을 담은 다음 에어건으로 한 장 한 장 도금을 했다고 하니 많이 자동화된 거죠. 금형 작업할 때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어요. 그 친구들이 기술 이전해준 대로 똑같이 했는데 계속 스탬퍼에 얼룩이 생기는 거예요. 아는 화학 교수님이랑 하나씩 성분 분석을 다 해서 겨우 찾아냈죠. 매뉴얼에는 ‘증류수로 세척한다’고만 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증류수에는 철분이 많이 들어 있어서 문제가 됐던 거죠.” 메탈 작업이 끝난 뒤의 프레스 작업은, 어찌 보면 호떡을 만드는 과정과 유사하다. 일명 ‘햄버거’라 불리는 말랑말랑한 재료를 틀에다 넣고 위아래 170도의 열로 찍어낸다. 말랑말랑하고 두툼한 햄버거가 넓고 얇게 펴진다. 과정을 들여다보면 전혀 음악적이지 않지만 170도의 뜨거운 온도 사이, 수많은 골짜기에서 음표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엘피를 찍을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찍어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간단한 일이 아니다. 녹음된 음원의 마스터링도 새로 해야 하고, 제작비도 만만치 않다. 재킷까지 만들었을 때 장당 제작비가 1만3000원에 이른다. 물론 생산량이 많아지면 단가는 낮아지지만 엘피를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투자 대비 거둬들일 수 있는 수익이 적다. 유명한 뮤지션들의 경우, 음원의 소유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점도 걸림돌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망이 완전히 어두운 것도 아니다. 이길용 대표는 홍대 인디 뮤지션들의 엘피를 제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새로운 뮤지션들의 엘피를 제작하고 싶어한다. 자신이 제작비를 대더라도 새로운 음악을, 너무 빨리 달려나가는 바람에 잊게 된 소리들을 엘피에 담고 싶어한다. “제 돈을 투자하지는 못했지만 얼마 전에 만든 김광석 한정음반은 상업적으로도 성공했어요. 음악만 좋으면 제가 투자할 겁니다. 제작비 빼고, 수익을 나눠 가질 수 있는 거죠. 홍대 인디 뮤지션들의 경우는 돈을 벌려고 하는 게 아니라 소리를 나눠 주고 싶어요. 뮤지션들에게 멋진 엘피를 선물하고 싶고, 팬들에게는 새로운 소리를 선물하고 싶어요. 아이돌의 엘피를 제작하기도 하고, 홍대 뮤지션들의 엘피도 제작하고,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엘피의 소리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기술은 대부분 진보하지만, 어떤 기술은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다. 아무도 그 기술을 거들떠보지 않기 때문이다. 기술은 필요에 의해 개발되고, 필요에 의해 채택되며, 필요에 의해 발전한다. 그 필요의 의미는 다양하다. 어떤 필요는 몇몇 사람의 경제적 부유함일 수도 있고, 또 어떤 필요는 강력한 파괴의 힘일 수도 있다. 스탬퍼를 다듬는 기계는 195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고, 엘피를 찍어내는 프레스 기계는 1978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는 아무도 엘피의 기술을 발전시키려 하지 않는다. 버려진 기술이며 채택되지 못한 기술이며 사라질지도 모르는 기술이다. 엘피의 음원을 압축하고, 쓸데없는 소리를 제거하면 더 쉽게, 더 빨리, 더 많은 양의 음악을 생산할 수 있다. ‘생산’이라는 단순한 잣대로 보더라도 엘피는 (시디나 엠피3 같은) 다른 미디어와의 게임에서 도저히 승산이 없다. 엘피팩토리의 1978년산 프레스 기계에서 한 장 한 장 찍혀 나오는 엘피들을 보고 있자니, 이야기 속의 재미있는 캐릭터를 보는 것 같았다. 쇠망치 같은 원시적인 무기 하나만 들고 돈키호테처럼 적들을 향해 달려드는, 질 걸 뻔히 알지만 승부 따위 상관하지 않겠다고 작심한 듯, 씨익 웃으며 달려드는 거인을 보는 것 같다. 매력적인 캐릭터다. 거인은 싸움에서 이길까. 이길 수 있을까. 패할 확률이 높은 걸 알기에 우리는 거인을 응원하게 된다. 무모하기에 흥미롭고, 합리적이지 않기에 사랑스럽다. 엘피가 갑자기 많이 팔려서 시디나 음원 판매를 앞지르는 일은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예전처럼 많은 사람들이 엘피의 먼지를 닦으며 음악을 듣는 일도 없을 것이다. 꼭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옳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엘피가 끝까지 살아남아서 계속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게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가 뭐 잊고 있는 건 없는지, 너무 많은 걸 줄이고 압축하는 바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까지 줄인 것은 아닌지, 우리가 한때 진심으로 사랑했던 음악을 무덤덤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질문을 던지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끝내 엘피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중혁 소설가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