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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중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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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중혁의 메이드 인 공장 ⑬ 초콜릿 공장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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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유기체로 변했는지도 모른다
따끈한 초콜릿 스위트가 관을 타고
피처럼 건물 곳곳을 돌아다니는 곳
향긋한 초콜릿들이 숙성되는 곳
길가던 아이들이 멈출 수밖에 없는 곳 초콜릿 공장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유명한 장면 하나만 보여주면 끝이다. 팀 버튼의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오프닝 시퀀스만 보면 초콜릿 공장의 내부를 반 이상 본 거나 마찬가지다. 영화가 시작되면 배관을 통과한 ‘초콜릿색’ 초콜릿을 디포지터(Depositor)로 몰드에 주입한다. 몰드를 바이브레이팅하여 제품 모양을 만들고, 쿨러로 초콜릿을 냉각한다. 영화 속에서는 애드벌룬으로 초콜릿을 이동시키는데 당연히 그런 건 없고 (팀 버튼은 생산비 절감 개념이 아예 없는 사람이니까) 냉각된 초콜릿을 포장지로 싸면 끝이다. 현실의 공장과 팀 버튼이 만들어낸 공장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초콜릿을 만드는 공정이 비슷한 것은 당연할 텐데, 내가 찾은 공장은 팀 버튼이 만들어낸 공장과 외관도 무척 닮았다. 공장의 위치는 서울 시내 한복판인 영등포 근처였다. 서울 시내에 이렇게 큰 공장은 거의 없다. 멀리서 공장을 보면 비효율의 극치 같다. 대부분의 공장들이 수도권으로 옮겨가거나 아예 다른 나라로 옮겨가는 판에 땅값이 비싼 서울 한복판에 초콜릿(을 비롯한 제과) 공장이 있다는 게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혹시,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주인공인) 윌리 웡카가 실제로 공장을 운영하는 게 아닐까? 공장 속에는 움파룸파족들이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 속에 들어가면 마법의 공간이 펼쳐지는 게 아닐까? 당연히 그럴 리 없지만 초콜릿 공장을 바라보면 그런 상상을 하게 된다. 로얼드 달의 원작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하루에 두 번, 등하교 시간에 찰리 버켓은 초콜릿 공장 입구를 지나쳐 가야 했다. 그때마다 그는 최대한 천천히 걸어가며 코를 킁킁거리면서, 달콤한 초콜릿 냄새를 흠뻑 들이마시곤 했다. 아, 그 냄새는 얼마나 황홀한지! 찰리는 공장 안으로 들어가보고 싶었다. 도대체 이 초콜릿 공장 안은 어떻게 생겼을까?” 초콜릿 공장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찰리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에, 내가 가본 공장 중 가장 좋은 향이 실내 곳곳에 퍼져 있었다. 달콤하고, 은은하고, 유혹적이면서도 편안했다. 좋은 초콜릿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년 내내 똑같은 온도를 유지해야 하는데, 온도 역시 내 몸에 안성맞춤이었다.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다. 윌리 웡카가 공장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나라도 나가기 싫겠다. 초콜릿은 생각할수록 흥미로운 물질이다. 초콜릿은 여유와 행복의 상징이었다. 미군의 지프차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기브 미 쪼꼴릿’을 외쳤다는 어르신들의 일화를 수없이 들었다. 그건 어쩌면 ‘기브 미 여유와 행복’을 외친 것일지도 모른다. 한때 초콜릿은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시절, 외제 초콜릿을 들고 와서 거드름을 피우던 몇몇 친구들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집은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내가 가진 국산 초콜릿으로는 친구들의 외제 초콜릿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외제 초콜릿은 강력했다. 초콜릿 한 조각씩 나눠주면 아이들은 전부 녹아내렸다. 초콜릿은 미식의 상징이기도 하다. 나는 한때 피스톨 형태의 카카오 99퍼센트 초콜릿에 빠져서 식후 하나씩 디저트로 먹기도 했는데, 먹으면 먹을수록 깊이가 있는 맛이었다. 달콤함의 그래프를 몸으로 체험하는 것처럼 가장 단 맛과 가장 쓴 맛이 그 속에 공존하고 있었다. (가격 문제로 지금은 끊었다.) 이제 초콜릿은 다시 여유와 행복의 상징이 된 것 같다. 어르신들이 어린 시절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초콜릿 하나만큼의 여유와 행복을 원했다면, 지금 우리는 돈과 인간관계의 스트레스 속에서 초콜릿 한 조각만큼의 여유와 행복을 원하고 있다. 공장에서 만들어낸 최고의 스테디셀러 ‘가나초콜릿’의 카피가 지금도 생생하다. ‘가나와 함께라면 고독마저 감미롭다.’ 오래된 카피지만 요즘 들어 더욱 와닿는 문장이다. 혼자 있는 시간, 초콜릿을 먹으며 쉴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감미로울까. 우리는 초콜릿을 먹는다는 행위에 대한 죄책감을 갖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흔한 농담처럼 ‘단거는 위험하다(danger)’고 생각한다. 쾌락을 좇는 것은 건강을 해치는 일이며, 여유와 행복을 추구하기보다 더욱 성실하게 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린 그렇게 살아왔다. 윌리 웡카는 초콜릿을 이렇게 정의한다. ‘초콜릿은 사랑을 받는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는 엔도르핀을 분비하게 해주는 물질’이다. 실제 카카오 폴리페놀을 비롯한 여러가지 초콜릿 성분들이 (각종 성인병 예방과 우울증 해소처럼) 인체에 유익하다는 보고가 이어지며 초콜릿 판매량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는데, 어쩌면 그건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현대인들의 마음이 작용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카카오 함량이 높은 초콜릿이 점점 잘 팔리는 것은, 맛을 추구하려는 마음과 사랑받고 싶은 마음의 시너지 효과 때문은 아닐까, 나 혼자 추측해봤다. 다시 공장으로 되돌아오자. 공장의 모습이 팀 버튼의 영화 속 장면과 흡사하다고 묘사했지만 물론 그게 다는 아니다. 영등포 공장의 진면목은 초콜릿을 포장하는 곳이 아니라 모든 초콜릿 제품의 근원이 되는 일명 ‘초콜릿 스위트’를 만드는 곳이다. 영등포 공장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가나에서 카카오 원두를 사들여서 직접 가공하는 곳이다. 원두를 가공해 여러가지 재료를 넣은 다음 하루 동안 배합을 한다. 제품마다 스위트의 배합과 성분과 숙성시간이 다르다. 아이스크림콘에 들어가는 초콜릿의 스위트가 다르고, 막대초콜릿과자에 들어가는 스위트가 다르고, 기본적인 초콜릿 스위트가 다르다. 배합실에서 만들어진 스위트는 24시간 동안 에이징을 하게 되는데, 이곳의 분위기가 기묘하다. 수많은 저장고에 다양한 종류의 스위트가 들어가 있는데, 끼이익 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공간에 울려퍼진다. 스위트가 굳지 않도록 계속 저어주는 소리인데, 어떻게 들으면 생물체가 번식하는 소리 같기도 하다. 영등포 공장이 세워진 것은 1967년이다. 초콜릿을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1975년 3월이다. 처음에는 간단한 초콜릿만 만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한 제품을 만들었고, 공장의 크기도 커졌다. 공장의 크기가 커질수록 초콜릿 스위트를 옮기는 게 문제였다. 해결책으로 건물과 건물 사이로 배관이 흐르기 시작했다. 영화 속 장면과 비슷하다. 따끈따끈한 초콜릿 스위트가 관을 타고 다른 건물로 이동하는 것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영화 속에서야 그냥 이동시키면 되지만 현실에서는 고려해야 할 게 많다. 겨울에는 얼 수도 있다. 그래서 따로 열을 가해주어야 한다. (아직까지 그런 적이 없지만) 어딘가 한군데 막히면 배관을 몽땅 뜯어내야 한다.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배관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싸다. 쉽게 공장을 이전하지 못하는 데는 그런 이유도 있다. 공장을 이전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건물과 배관을 모두 해체해서 옮기는 데 더 많은 비용이 들 수도 있다. 어쩌면 언젠가부터 이 공장은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변한 것인지도 모른다. 따끈따끈한 초콜릿 스위트가 관을 타고 피처럼 건물 곳곳을 돌아다니는 곳, 향긋한 초콜릿들이 소리내며 숙성되는 곳, 길을 지나가던 아이들이 멈출 수밖에 없는 곳, 상상력을 발동하여 꿈을 꾸게 하는 곳. ※취재에 도움을 주신 롯데제과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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