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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9.04 19:42 수정 : 2013.09.05 15:26

일러스트레이션 김중혁

[매거진 esc] 김중혁의 메이드 인 공장 ⑭ 초콜릿 공장 (하)

한참 후에야 초콜릿에 핀 곰팡이를
먹어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실은 그건 곰팡이가 아니었다.
초콜릿 속의 유지가 안정되지 못하면
흰색 반점이 생기는데
이것을 블룸 현상이라고 한다

초콜릿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몇 개 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아이들이라면 초콜릿을 좋아하게 마련이고, 아이들 옆에는 초콜릿을 먹지 못하게 하는 어른들이 있게 마련이다. 어쩌면 세상은 그렇게 굴러가도록 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뭔가 금지시키고,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면 새로운 아이들에게 뭔가 금지시킨다. 금지와 허용이 반복된다. 반복되는 금지와 허용 사이에서 아이들은 자란다. 금지가 많은 곳에서 자란 아이들과 허용이 많은 곳에서 자란 아이들은 많이 다를 것이다.

나 역시 어린 시절에 초콜릿을 무척 좋아했다 하는 것은 무척 약한 표현이고, 없어서 못 먹었다. 쫀드기와 뽑기 같은 불량식품 틈바구니에서 초콜릿은 숭배받을 만했다. 입안에서 찐득하게 녹아내리는 감촉은 먹을 때마다 경이로웠다. 초콜릿을 먹는다는 것은 사치였고, 일탈이었다. 친구들이 가게에서 가장 많이 훔치는 제품 역시 초콜릿이었다. 내가 먹어본 초콜릿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맛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다가 어떤 장소가 떠올랐다.

부모님의 고향은 안동의 시골 마을인데, 명절이 되면 어머니의 손을 잡고 그곳에 가곤 했다. 그중에서도 외갓집은 기차를 타고 간 다음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하는 곳이었고, 마을로 들어가는 버스는 하루에 두 대뿐이었다. 지금도 외갓집 가던 길의 허름한 정류장들이 생각난다. 어찌 된 일인지 한번은 형과 나 둘이서만 외갓집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아마도 부모님이 무척 바빴을 때였을 것이다. 우리를 끔찍이 예뻐해주시던 외할머니는 우리가 지루할 틈이 없게 하려고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주시고 소도 구경시켜 주셨지만, 외할머니의 손맛 같은 건 모르던 나이였고, 눈만 끔뻑거리고 있는 소가 재미있을 리 없었다. 할머니는 사태의 심각함을 파악하고, 나를 동네의 구멍가게로 데려가셨다. 뭔가 먹을 걸 주어야 하루 종일 심심하다고 종알대는 내 입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하신 것이다. 할머니는 꼬깃꼬깃한 지폐를 꺼내 과자를 사주셨고, 초콜릿도 사주셨다. 과자는 몇 분 내로 다 먹었고, 초콜릿은 아껴두었다. 다음날 형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러 가려면 먼지 풀풀 풍기는 길을 한참 걸어가야 했다. 나는 초콜릿을 꺼냈다. 초콜릿의 금박을 벗기는 순간, 나는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초콜릿에 하얀 곰팡이가 핀 것이다. 나는 하얀 곰팡이가 피어 있지 않은 부분만 잘라내서 초콜릿을 먹었다. (아마도) ‘아이 씨, 시골이니까 이거 봐, 초콜릿도 이래!’라는 생각을 하며 초콜릿을 먹었던 것 같다. 발걸음은 실망으로 가득 차서 무거웠지만 초콜릿은 달았다. 반밖에 먹을 수 없어서 더 소중한 맛이었고, 걷는 동안의 친구여서 더 달게 느껴지는 맛이었다. 형과 함께 걸었는데 초콜릿을 혼자 다 먹었던 것 같은 기억은 나의 착각일까, 아니면 초콜릿이 두 개였을까?

한참 후에야 초콜릿에 피어 있는 곰팡이를 먹어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실은 그건 곰팡이가 아니었다. 초콜릿 속의 유지를 안정시키지 못하면 초콜릿과 기름이 분리되고 표면에 흰색 반점이 생기게 되는데, 이것을 블룸(bloom) 현상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기술이 좋아져서 이런 현상이 많이 없어졌지만 초콜릿을 저온 관리하기 어려운 시골의 가게에서는 종종 블룸 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외할머니가 사준 초콜릿 역시 관리 소홀로 인한 블룸 현상이 발생한 제품이었을 것이다. 지금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먹다 버린 초콜릿이 아깝기도 하고, 하얀색 반점을 더럽다고 생각한 게 부끄럽기도 하다. 초콜릿을 버리게 된 데에는 외갓집의 모든 것이 촌스럽고 비위생적이라고 생각한 나의 마음도 큰 작용을 했을 것이다. 시골길을 걷던 어린 시절의 내 앞에 초콜릿 전문가가 나타나서는 “완제품 상태에서의 유통기간은 1년입니다. 보관 온도만 잘 지키면 갓 만든 초콜릿과 비교해도 풍미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드셔도 됩니다”라고 말해봤자 그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성인이 되었을 때 외할머니를 좋아하면서도 송구스러웠던 것이 그런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배합실에서 만들어진 스위트를 24시간 동안 배합하고, 온도 조절하는 것이 유지를 안정화하기 위한 작업이다. 완성된 초콜릿을 박스에 담은 후에도 곧바로 출시하지 않는 이유도 유지 안정화 때문이다. 여름이면 스티로폼에다 담아서 옮기고, 냉방차를 이용해 운송하는 것 역시 유지 안정화 때문이다. 가장 많은 클레임이 들어오는 게 블룸 현상 때문이니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연구원들의 말을 들어보면 외국의 초콜릿들은 배합 시간이 고작 5시간 안팎이라고 한다.

여름이 초콜릿의 비수기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여름이 되면 어쩐지 모든 초콜릿이 녹아내릴 것 같다. 막대과자를 선물하는 것도 겨울이고, 초콜릿을 선물하는 것도 차가운 날이다. 전세계적으로 초콜릿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크리스마스 역시 한겨울이다. 밸런타인데이가 7월이나 8월에 있었다면 헤어지는 커플이 여럿 생겼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나한테 상한 초콜릿을 선물할 수 있어? 당장 헤어져!” “아냐 그건 블룸 현상이라고 해서 꽃을 사지 못한 내 마음을 초콜릿에 담은 거야.”(‘Bloom’은 꽃이 피었다는 뜻이고 실제 블룸 현상은 꽃이 핀 것 같은 모습이다.) “어디서 사기를 치고 있어. 당장 헤어져.” 이런 대화가 오가지 않을까? 초콜릿 활성화를 위해 1년 중 가장 더운 8월8일을(숫자 8은 블룸하게 생기지 않았나?) ‘블룸 데이’로 정한 다음 블룸 현상이 일어난 초콜릿을 서로 선물하면 어떨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도 전하고 재고 정리도 할 수 있고 좋지 않을까. 블룸 현상이 가장 예쁘게 생겨난 초콜릿 콘테스트도 하고….

2010년 미국의 한 조사에서 ‘섹스와 초콜릿 중 하나를 고르라면 무엇을 선택하겠는가’라는 물음에 많은 여성이 초콜릿을 선택했다고 한다. 불확실한 인간관계 속에서의 쾌감보다는 확실하고 안전한 쾌감을 원한다는 뜻일까. 아니면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초콜릿만의 마력이 있는 것일까. ‘초콜릿의 성분 중 폴리페놀이라는 물질이 암에 좋다더라’ ‘아니다, 심장병에 더 좋다더라’ ‘초콜릿을 먹는 사람이 더 날씬하다더라’ 매년 새로운 연구 결과가 쏟아져 나온다.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더 많은 연구가 쏟아져 나올 것이다. 이런 연구 결과를 볼 때마다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동물일까’ 궁금한 마음이 커진다. 자신에 대해서 궁금한 것도 많고, 주위의 세계를 알아내려는 마음도 무척 크다.

나는 ‘섹스와 초콜릿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 미국의 조사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그건 마치 ‘친구와 휴대전화기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말과 비슷한 것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친구 대신 휴대전화기를 선택할지도 모르겠지만) 인간이 휴대전화기를 발명한 것은 더 많은 친구를 사귀기 위한 것이었다. 인간과 인간을 잇는 것이 휴대전화기다. 초콜릿을 만든 것이 더 많은 섹스를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설마 그랬나?) 초콜릿은 인간들을 보다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물질이다. 윌리 웡카가 초콜릿을 통해 가족과 친구를 얻었듯 ‘사랑을 받는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는 엔도르핀을 분비하게 해주는 물질’인 초콜릿을 통해 우린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좀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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