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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조음 과정에 쓰이는 도구들 일러스트레이션 김중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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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김중혁의 메이드 인 공장 (17) 피아노 제작 공장 (상)
공장은 어째서 죄다 멀리 있는가. 머나먼 공장들이 야박하다. 심지어 이번엔 교통도 불편하다. ‘한방’에 가는 고속버스도 없어서 시외버스를 타야 했다. 돌고 돈 다음, 여러곳을 거쳐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자동차 없앤 걸 후회하지 않았는데, 이번엔 자동차가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가을이니까, 하늘이 높고 파란데 공기는 또 서늘도 하여 여행 다니기 참 좋은 계절이니까, 내가 참는다.
말없이 혼자 공장 취재를 다니다 보니 풍경을 보는 방식도 많이 바뀌었다. 전에는 버스나 기차를 타면 파란 하늘과 황금빛 들녘이 먼저 보였는데, 이젠 공장부터 보인다. 공장의 규모를 가늠해 보면서 공장의 실내를 상상한다. 공장 안에서 부품과 제품과 상품을 만들고 있을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사람 참 간사하다. 하는 일이 바뀌니 보이는 게 바뀌고, 보는 풍경이 바뀌니 생각도 바뀐다. 요즘 대형 할인매장에 가서 공산품을 볼 때마다 어느 나라에서 만들었는지 꼭 확인한다. 취재할 만한 재미있는 공장을 찾는 것인데 ‘메이드 인 코리아’ 찾기가 꽤 힘들다.
버스에 탄 채 한적한 도로를 달리다 보면 세상에, 공장은 어찌나 그렇게 많은지 새삼 놀란다. 저렇게 만들 게 많나, 저렇게 써야 할 도구가 많나. 공장의 간판을 보고 도대체 뭘 만드는 곳인지 추측하기 어려운 곳도 많다. 세상에 물건은 많고 공장도 많다. 공장 부지를 내놓은 곳도 보이고 (망한 거지!) 공장을 새로 짓고 있는 곳도 있고 (꿈에 차 있겠지!) 거대한 트럭에 뭔가 싣고 있는 곳도 보인다. 부질없는 인사겠지만, 모든 공장이 잘되길 바란다.
이번 목적지는 특별한 공장이다 보니 시외버스 타고 가는 길이 조금은 여유로웠다. 여유로워야 했다. 악기를 만드는 곳, 그중에서도 피아노를 만드는 공장으로 향하는데 조급한 마음이면 안 된다. 최종 목적지로 곧장 달려가지 않고 여기저기 수많은 동네를 들렀다 가는 시외버스 안에서,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모차르트를 골랐다. 느긋하고 여유있게 여행을 즐기자. 풍경을 보며 피아노를 느끼자. 시외버스가 속도를 내고 귓속으로 피아노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잠이 들었다. 이런!
모차르트는 1777년 새로운 피아노의 음색에 열광하며 편지에 이렇게 썼다. “피아노는 어떤 식으로 건반을 만지더라도 음색이 균일하다. 절대 귀에 거슬리지 않으며, 더 강해지거나 약해지지 않는다.” 그래, 내가 잠에 빠진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어. 절대 귀에 거슬리지 않는 피아노 소리 때문에 잠이 든 것이라고 핑계를 대 본다.
피아노 소리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관심이 많았다. <자동피아노>라는 단편소설을 쓴 적도 있고, 피아노 연주자가 주요 인물로 나오는 소설도 썼다. 피아노에 대한 나의 관심은 단순한 것이었다. 피아노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게 신기했다. 피아노 소리는 딱딱한 듯 부드럽고 약한 듯 강하다. 흔한 소리가 아니다. 현실의 소리 같다가도 꿈속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기도 하다. 아마도 타현악기이기 때문에 그런 미묘한 소리가 나는 것일 텐데, 듣고 또 들어도 질리지 않는 그 소리에 오래전부터 매료됐다. 피아노 만드는 곳에 한번 가보고 싶었다.
피아노에 대한 환상만큼 피아노 공장에 대한 환상도 있었다. 피아노에 대한 아름다운 책인 사드 카하트의 <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에는 뭉클한 피아노 공장 에피소드가 하나 등장한다. 어느 날 조음 견습공이 (유명한 피아노 회사인) 스타인웨이 공장에 일하러 갔다가 과묵한 스승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게 됐다. 스승은 공장에 들어온 낡은 스타인웨이 그랜드피아노의 해체된 액션(건반악기의 기계장치) 앞에 서 있었다. 견습공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스승은 그랜드피아노를 분해하다가 내부의 감춰진 공간에서 다른 기술자의 오래된 서명을 보았다고 대답했다. 다름 아닌 돌아가신 아버지의 서명이었다.
피아노가 어떤 악기인지 설명해주는 일화다. 실제로 피아노 장인들은 피아노의 비밀스러운 공간에 자신만의 서명을 남긴다고 한다. 피아노 장인들은 미세한 소리에도 극도로 예민하며, 피아노의 재료인 나무들과 대화하는 사람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그런 장인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더욱 긴장하게 되었고, 그래서 잠이 온 것은 아닐까 핑계를 대 본다.
실제로 본 피아노 공장은 (밖에서 본 피아노 공장은 말 그대로 빙산의 일각인 것으로 밝혀졌지만) 생각보다 작았다. 공장으로 들어가려고 건물을 따라 걷는데 건물 안에서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왔다. 밖으로 새어 나오는 피아노 소리가 아름답다고 느낀 건 참 오랜만이었다. 널찍한 공장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리자 소음 같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를 떠올리게 할 만큼 아련한 소리였다. 일상에서 피아노 소리를 자주 듣긴 한다. 아파트 아래층에서는 일요일 아침마다 피아노를 친다. (거, 실력 참 안 늡니다)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에서도 피아노 연주가 종종 등장한다. (피아노 연주가 아니라 묘기 자랑 같다) 피아노 소리를 자주 듣지만 일상 속에서 마음 놓고 피아노 소리를 들어 본 게 언제인가 싶다.
디지털 피아노는 점점 아날로그 피아노를 닮아가며 아날로그 피아노 같은 소리를 내고 있다. 디지털 피아노는 조용하다. 헤드폰으로 소리를 들으며 피아노를 칠 수 있다. 건반의 액션이 현을 때려 소리를 내는 아날로그 피아노의 판매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가격 역시 아날로그 피아노가 훨씬 비싸다. 비쌀 수밖에 없다. 아날로그 피아노는 나무로 만들어지고, 나무의 울림으로 소리를 만들어낸다.
피아노 역시 수많은 아날로그·디지털 디바이스의 운명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다. 종이책과 전자책, 엘피와 시디, 비디오테이프와 디브이디. 아날로그는 부피가 크고 불편하지만 소수의 지지자가 있고, 디지털은 작고 간편하며 많은 사람이 손쉽게 사용한다.
어쩌면 그건 고속버스와 시외버스의 차이인지도 모르겠다고,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생각했다. 고속버스는 최대한 빨리 목적지로 데려다 주지만 많은 정류장을 생략할 수밖에 없다. 생전 이름도 처음 듣는 (이거 봐, 벌써 정류장 이름 잊어버렸다) 작은 정류장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웃고 떠들며 버스에 오르는 장면을 절대 볼 수 없으며, 작은 동네의 세탁소 앞에서 고풍스러운 양복을 찾아 들고 환하게 웃던 아저씨의 표정 같은 것도 놓칠 수밖에 없다. 빠른 건 빠른 대로 중요하고, 느릿느릿 돌아가는 건 또 그것대로 필요하다. 어떤 게 더 낫다는 주장이 아니라 둘 다 필요하고 둘 사이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피아노 공장에 들어섰을 때의 느릿느릿하고 나른한 풍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피아노 공장의 창으로는 햇볕이 들어오고 있었으며 (여지껏 작업장으로 햇볕이 들어오는 공장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몇명의 장인이 피아노 앞에 서서 건반을 치고 있었다. 소리들은 작은 작업장 안에서 맴돌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해머가 현을 두드리고, 나무 속의 현이 떨리며 소리를 내다가 사라졌다. 그럴 수 있다면, 공장의 풍경과 소리를 ‘복사하기’ 한 다음 휴식이 필요할 때 내 앞에 ‘붙여넣기’ 하고 싶었다. 겉으로 평온해 보이는 공장의 뒤편에는 놀라울 정도로 거대한 시설도 있었는데, 공장의 자세한 면면과 피아노 만드는 공정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계속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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