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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중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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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esc] 김중혁의 ‘메이드 인 공장’
가방 공장 (하)
가방 공장의 출발점은 가죽 보관실이다. 많은 가방을 가죽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에 가죽의 보관과 활용이 가방 회사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볼 수도 있다. 오래 보관하면 기름기가 빠져서 쓸 수 없고, 잘못 재단하면 버리는 자투리가 많아지며, 단 한번의 바느질 실수로도 쓸모없어지는 것이 바로 가죽이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며, 우리는 죽어도 가죽을 남기지 말자, 라고 회사의 커다란 벽 어딘가에 쓰여 있을 것만 같다. 공장을 돌아볼 때 가죽의 소중함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가죽의 선택과 재단이 끝나면 배접반으로 이동한다. ‘배접’이란 얇은 조각을 포개어 붙이는 일을 뜻하고, 공장에서는 가죽을 포개어 붙이는 배접 공정을 통해 가방의 뼈대를 세우게 된다. 한국의 가방 공장에서는 유독 배접 공정이 중요하다. 가죽 가방은 크게, 서는 가방과 주저앉는 가방,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서는 가방이란 굳건하게 중심을 잡고 서 있는 가방이고, 주저앉는 가방이란 흐물흐물하게 아래로 접히는 가방이다. 한국의 가방 공장들은 일본 기술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서는 가방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고 한다. 서는 가방은 가죽 안에 보강재를 넣기도 하고, 안감을 대기도 하니 배접이란 굳건하게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가방의 기둥을 세우는 일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서는 가방과 주저앉는 가방 이야기를 듣다 보니 몇 해 전 유럽의 벼룩시장에 갔던 때가 떠올랐다. 유럽의 벼룩시장에 가면 참으로 다양한 디자인의 가죽 가방을 만나볼 수 있으니 가방 중독자로서 들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가게 가득 쌓여 있는 가죽 가방을 보면서, 가죽 향을 맡으면서, 나는 황홀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허름한 중고품이 대부분이었지만 중고라서 더욱 살아 있는 생물체처럼 보였다. 어떤 가방은 서 있었고, 어떤 가방은 주저앉아 있었고, 어떤 가방은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어떤 가방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듯 허리를 편 채 서 있었고, 어떤 가방은 피곤해서 누워 있었고, 어떤 가방은 구석에 시무룩하게 앉아 있었다. 그들을 구출해내야 할 것 같다.
한참 가방 구경을 하다가 한쪽 구석에 누워 있는 폴리오 케이스(Folio Case: 일반적인 형태의 서류 가방)를 발견했다. 붉은빛이 감도는 얇은 가죽 가방이었는데, 가방을 여는 방식이 무척 독특했다. 내가 보기엔 참 멋진 가방이었는데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나는 가방을 집어들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가방 정면에 ‘이 머리’(E. Murray)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자신의 가방을 너무나 사랑한 탓인지, 자신의 물건을 잘 간수하지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인지, 가방에다 커다랗게 이름을 적어놓은 것이다. 나는 이름이 적혀 있는 가방이 마음에 들었다. 가방을 사 들고 오면서, 한 사람의 일상을 상상해보았다. 머리씨는 가방을 들고 어딜 갈까. 회사원일까, 공무원일까,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까, 아니면 헌책방의 사장님일까. 상상은 끝없이 이어진다. 가방은 그런 상상을 하기에 딱 좋은 물건이다. 폴리오 케이스가 아니라 여성용 핸드백이었다면 더욱 야릇한 상상을 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핸드백은 아무리 들여다봐도 어떤 게 내 맘에 드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패션쇼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명품을 소개할 때에도 눈길이 멈추는 가방은 거의 없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방은 ‘스리웨이’(3Way) 가방이다. 크로스백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손잡이로 들고 다닐 수도 있고, 백팩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세가지 방식이 결합된 가방이라면 디자인이 어찌 됐든 일단 마음이 끌린다. ‘스리웨이’ 가방만 보면 정신을 잃는 나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질 때도 있었지만, 가방의 본질에 가장 근접한 마음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다. 인류의 정착 생활로 인해 가방이 시작됐고, 식량 운반과 저장을 위해, 때로는 다른 지역 사람들과의 물물교환을 위해 가방은 발달해왔다. 물건을 잘 운반하기 위해서는 ‘스리웨이’가 필수지, 암, 그렇고 말고. 나는 가방의 본질을 잊지 않고, 가방을 진짜 가방으로 쓰고 있는 셈이다. 내가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처음 가방이 만들어지던 때로 돌아간다면 ‘스리웨이’ 가방을 선물로 주고 싶다. 한번 써 보면 반하고 말겠지. 내가 선물한 ‘스리웨이’ 가방을 바탕으로 수많은 개발이 이뤄질 것이고, 내가 현재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엄청난 가방이 개발돼 있지 않을까, 싶지만 가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앞으로도 가방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여성들의 가방 역시 달라진 건 많지 않다. 오래전의 핸드백은 주로 열쇠나 빗, 칼, 향수를 넣는 데 쓰였다. 핸드백은 한때 여성들의 치마 속으로 들어가서 은밀하게 사용되기도 했지만, 여성들의 옷이 슬림한 스타일로 변하면서 다시 손으로 들고 다니게 됐다. 예나 지금이나 핸드백은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할 물건들,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물건이 들어 있는 방패다.
어떤 물건이든 마찬가지겠지만 만들어지는 공정을 보고 나면 가방이 달라 보인다. 하나의 덩어리로만 보였던 가방의 작은 조각들이 새롭게 보인다. 핸드백 만드는 공정을 보고 나니 이젠 어떤 핸드백이 좋은 핸드백인지 어렴풋하게 알 것 같다. 있어야 할 것들은 반드시 있고, 꼭 있어야 할 것들을 없는 것처럼 숨겨놓은 가방, 어차피 있어야 할 것들이라면 최대한 튼튼하고 아름답게 만들어놓은 가방. 그런 핸드백이 좋은 핸드백이 아닐까.(아, 아닐지도 모른다, 솔직히 자신없다.)
하나의 가죽 가방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 120번, 최대 1000번 정도 손이 간다. 하나의 가방은 최소 50쪽, 아주 세밀한 가방은 150쪽의 조각이 붙어서 만들어진다. 기계 작업을 할 수 있는 공정이라곤 가죽 재단실에서 가죽을 잘라낼 때와 재봉틀로 박음질을 할 때뿐이다. 가죽의 옆면에다 약물을 칠하는 일도, 가방 밑바닥에 쇠를 달기 위해 구멍을 뚫는 일도, 스트랩(끈)에 색을 입히는 일도, 모두 사람이 직접 해야 한다. 공장의 직원은 모두 60여명인데, 한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가방의 개수는 (월평균을 내보면) 하루에 두개꼴이다. 분업화된 방식을 고려해봤을 때 생산량이 무척 적은 편이다. 그만큼 노동집약적이고 공정이 까다롭다. 공장이긴 하되 공방이라 불러야 할 것 같은 곳이다.
공장의 샘플 개발실에서는 계속 새로운 가방을 만들어내고 있다. 개발실에서는 가죽 재단부터 배접, 조립, 재봉, 약물 공정까지 모든 공정을 진행해서 샘플을 만들어낸다. 만들어진 샘플이 성공적이면 업무의 표준을 만든 후 공정별로 작업지시가 전달된다. 매 시즌 100종류 정도의 샘플을 만들고 그중 3분의 1 정도만 살아남는다. 그중 절반 정도가 시장에서 살아남을 것이고, 그중 몇 개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매혹시키는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다. 선택받지 못한 가방들은 다들 어디로 갈까.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가방이 가득 쌓인 벼룩시장의 풍경을 떠올린다. 아, 그 가방들을 구출해 주러 가야 하는데….
김중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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