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레이션 김중혁
|
[매거진 esc] 김중혁의 ‘메이드 인 공장’
맥주 공장 (상)
몇 년 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하이네켄 맥주 체험관’에 간 적이 있다. 시내를 혼자 어슬렁거리다가 우연히 ‘하이네켄’이라는 글자를 발견하고는 꽤 비싼 입장료를 선뜻 내고 들어갔다. 나는 맥주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니까, 하이네켄은 좋아하는 맥주이기도 하니까,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티켓을 끊는데 나도 모르게 입에 침이 고였다. 막상 들어가보니 좀 민망하기도 했다. 수많은 입장객 중에 혼자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커플이거나 단체 관광객이거나 가족이었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게 분명한데도, 사람들이 나를 알코올 중독자 취급하면 어쩌나 신경쓰며 체험관을 조용히 걸어다니다가, 체험관에서 주는 맥주 두 잔을 마시고 나니 그런 어색함도 모두 사라졌다. 맥주는 맛있었다. 부드러운 거품 사이로 느껴지는 하이네켄 특유의 알싸한 맛이 감미로웠다. 하이네켄의 녹색처럼 입안이 싱그러워졌다. 클럽처럼 꾸며놓은 공간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자니, 거 뭐랄까, 치명적인 고독의 쓴맛과 낯선 장소의 설렘이 가슴속에 넘실거리는 듯했다. 그래, 맥주는 역시 혼자 마셔야 제맛이지 하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양조장 구경도 하고, 하이네켄 맥주의 역사도 공부하다가 ‘4D 체험관’이라는 곳에 들어갔는데, 내 인생에서 그렇게 뻘쭘한 적이 없었다. 그곳은 체험관을 빙자한 놀이기구였다. 관객이 맥주 1인칭 시점이 되어 자신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본다는 콘셉트였는데, 맥주가 옮겨질 때마다 관객석이 롤러코스터처럼 움직이고 흔들렸다. 어디선가 물방울도 흩날렸다. 진정한 4D 체험이었다. 맥주가 완성되어 상자로 들어가자 관객석이 깜깜해졌다. 관객들은 맥주의 심정이 되어 서로를 꼭 붙들고 안기면서 기쁨의 탄성을 질렀지만, 어둠 속에서 혼자 있는 나는 참 민망했다. 불량 맥주가 된 기분이었고, 하이네켄 상자 속에 든 하이트 맥주 같은 기분이었다. 맥주 상자가 열리자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들렸다. 어지러운 조명의 클럽이 모습을 드러냈다. 맥주가 클럽으로 옮겨진 것이다. 클럽에서 춤을 추던 화면 속 사람들이 맥주 병마개를 따면서 이야기는 끝이 났다. 어이없지만 재미있는 체험이기도 했다. 체험관을 나서면서 다짐했다. 그래, 다음 생엔 맛있는 맥주로 태어나자. 이번 생엔 정말 원없이 맥주를 마셨으니, 다음 생엔 맥주로 태어나서 사람들을 기쁘게 하자.
맥주를 참 많이도 마셨다. 한국에서도 마셨고, 외국 여행 중에도 마셨고, 맛있는 맥주도 마셨고, 맛없는 맥주도 마셨다. 내가 마셨던 모든 맥주들, 나를 시원하게 해주었던 맥주들을 모두 사랑한다. 일을 끝내고, 때로는 누군가를 축하하기 위해, 때로는 서로를 격려하기 위해, 술집에 모여 앉은 사람들 앞에 생맥주 한잔이 놓였을 때의 그 흥겨움, 건배를 하고 첫 잔을 마실 때 온몸으로 번져나가는 보리 향(때로는 밀 향)의 부드러운 넘실거림을 사랑한다. 맥주가 없었다면 힘든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까, 어색한 시간을 어떻게 견뎠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소주가 서로를 위로하는 술이라면, 맥주는 서로를 격려하는 술일 것이다. 나는 맥주가 가진 시원한 힘을 믿는 편이다.
맥주 공장에 가기 전날 ‘하이네켄 맥주 체험관’을 떠올렸다. 그때처럼 맛있는 맥주를 마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다. 한국의 맥주 공장에도 체험관이 있다. 미리 예약을 한다면 누구나 들를 수 있다. 직접 맥주가 되어보는 이벤트는 없지만 맥주의 역사와 맥주 광고의 역사 등 볼거리도 많고, 멋진 풍광을 보면서 생맥주 한잔 마셔볼 수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 맥주 공장에서 마셔본 생맥주는 맛있었다. 예상대로 맛있었고 예상외로 맛있었다. (어차피 기사 말미에 하이트진로 회사로부터 도움 받았단 얘길 쓸 테니 솔직히 밝히고 시작하자) 공장에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맥주인 맥스(Max)를 마셨는데, 평소 마시던 맥주의 맛보다 20% 이상 맛있었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을 것이다. 공장에서 직접 마신다는 심리적 요인도 있었을 것이고, 다른 소매점보다 맥주 관리에 엄격한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홍천강을 둘러싼 겨울의 풍경을 보면서 진하고 구수한 보리의 향을 들이켜는데 참 운치 있고 좋았다.
맥주가 없었다면
어색한 시간을 어떻게 견뎠을까
소주가 서로를 위로하는 술이라면
맥주는 서로를 격려하는 술일 것이다
나는 맥주가 가진 시원한 힘을 믿는다
맥주의 맛에 대한 이야기는 예민한 문제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 맥주가 맛이 없다’는 이야기를 한다. 나도 51% 정도 동의한다. 여러 곳에서 다양한 맥주를 마셔보았지만, 한국 맥주만큼 별다른 특징이 없는 맥주도 드물긴 하다. 한국의 맥아 함량이 턱없이 낮아서 맛이 없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고(이건 사실이 아니다. 1999년 12월 주세법 개정에서 맥아 함량 66.7% 이상 사용이라는 규정이 10% 이상으로 완화됐지만 대부분 맥주의 맥아 함량은 60% 이상이다), 맥아의 문제가 아니라 홉(hop)의 품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맛이 없다는 주장도 있고(홉이 맥주의 맛에 영향을 미치긴 하지만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한국 요리의 특성상 맵고 짠 양념이 많아서 맛과 향이 강한 맥주보다는 부드럽고 순한 맥주가 어울리기 때문에 그런 맥주가 발전하게 됐다는 이야기도 있다.(이건 물어보니 반쯤은 진실이었다)
51%밖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은 ‘취향’ 때문이다. 맥주 맛에 까다로운 사람도 맥주의 소비자이지만 하루의 갈증을 날려버릴 목적으로 ‘보리 향이 나고 시원한 술’을 원하는 사람 역시 맥주의 소비자이기 때문이다. 둘 중 어느 쪽이 맥주의 참맛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 사람들이 마시는 맥주는 한국의 고유한 맥주가 될 수밖에 없다. ‘가맥’(가게 맥주)을 즐기는 동네 어른들이, 관광버스에서 신나게 춤추다가 타는 목을 맥주로 달래려는 어머니들이, 편의점 파라솔 아래에 모여서 멍하게 신세 한탄을 하는 아저씨들이 상면발효맥주 ‘에일’을 즐기는 건, 나로서는 상상이 잘 안된다.(무시하는 게 절대 아닙니다요!)
맥주 회사에서도 이런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다. 맥주가 맛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발끈하기도 하고, 맥아 함량을 공개하기도 하지만 오해는 잘 풀리지 않는다. 오해가 아닐 수도 있을 것이고, 오직 오해하는 사람만 수면 위로 떠오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맥주를 맛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맥주 맛을 지키려는 사람들’이라는 카페를 개설할 리 없다. 긍정의 결속력은 약하고, 부정의 결속력은 강하다. 대중은 늘 조용하고 거대하다. 맥주 회사가 대중의 입맛을 길들였는지, 아니면 대중이 원하는 맛을 맥주 회사가 맞춰가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어쨌거나 지금의 맥주 맛은 이렇게 정해졌다.
1880년대 개항과 함께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맥주가 들어왔다. 1933년 대일본맥주가 영등포에 조선맥주 공장을 설립하면서 국내에 최초로 맥주가 생산됐고, 해방 후 미군정에서 관리하던 맥주 공장을 1951년 민간에 넘기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사이 맥주 시장은 어마어마한 성장을 이뤘다. 해외여행이 활성화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외국의 맥주 맛을 보게 됐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다양한 수입맥주를 맛볼 수 있게 됐고, 누구나 맥주의 맛에 대해 한마디씩 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맥주 공장을 둘러보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한국에 맥주 2.0 시대가 곧 시작되겠구나 하는 거였다. 한국의 맥주는 변하고 있고, 새로워지고 있다. 변화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회에 계속.
※취재에 협조해주신 하이트진로에 감사드립니다.
김중혁 소설가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