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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2.05 20:02 수정 : 2014.02.06 14:03

[매거진 esc] 김중혁의 ‘메이드 인 공장’
맥주 공장 (하)

외식 전문 잡지에서 와인 담당 기자를 한 적이 있다. 와인에 대해서는 쥐뿔도 몰랐기 때문에 하나하나 공부를 해가면서 기사를 썼다. 포도의 품종을 배우고, 라벨(전문용어로는 에티켓이라 부른다) 읽는 법을 배우고, 대륙별 와인의 차이에 대해 공부했다. 와인을 글로 배운 셈이고, 배운 걸 곧바로 글로 토해 낸 셈이다. 난감한 순간도 여러번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와인 특집 기사를 쓰기 위해 여러 와인을 한꺼번에 맛보는데, 계속 마시다 보니 그 와인이 그 와인 같고 이 와인은 또 저 와인 같고 저 와인은 아까 그 와인 같아서 나중엔 모든 맛이 뒤죽박죽이 돼버리고 말았다. 카베르네 소비뇽이니 메를로니 포도 품종의 차이는 오간 데 없어지고, 나중에 남는 것은 오로지 취기뿐이었다.

맛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여간 고달픈 일이 아니다. 와인 같은 경우엔 더 그렇다. 와인에서 나는 향 중에는 한국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게 많으니 미묘한 차이를 구별해내기가 더욱 어렵고, 그걸 또 문자로 표현하려면 한번 더 어렵다. 오스트레일리아 와인 특집 기사에서도 어쩔 수 없이 편법을 쓰고야 말았다. 한 와인에 대해 쓴 게 기억이 난다. ‘바싹 마른 사막 위를 달리고 있다. 먼지바람이 가득하다. 갑자기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이내 사방엔 습기로 촉촉하다. 사막의 흙맛과 그 위로 떨어진 빗방울의 맛이 어우러진 다음 허공을 꽃향기로 가득 채운다. 이 와인의 맛이 그렇다’라고 썼다. 와인 홍보 담당자에게 맞아 죽지 않은 걸 감사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와인을 마시면서 눈앞에 떠오른 풍경이 딱 그랬다.

(다행히 홍보 담당자의 항의가 없어서) 그 후에도 꽤 오랫동안 와인 기사를 썼다. 좋다는 와인도 많이 마셨고, 보르도 지역에 출장도 가게 됐고, 와인 책도 여러 권 읽었다. 다 소용없었다. 맛에 대해 쓰는 건 재능이 없는 게 아닌가 싶었다. 시간이 갈수록 문자라는 게 얼마나 빈약한 것인지 절감했다. 이제는 와인 기사를 쓰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저 기분 좋게 마실 뿐이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음료 중에 보리나 밀로 만든, 포도주와 비슷하고 품위가 떨어지는 액체를 마시는 사람들이 있다”라는 맥주 비하 발언을 했는데, 복잡하고 섬세한 와인의 맛에 절망한 사람으로서 일견 수긍이 가는 말이기도 하지만 포도주보다 맥주를 더욱 애호하는 사람으로서 일단 반기를 들 수밖에 없다. (로마 시대에 한 말에 이제 와서 반기를 드는 꼴이 우습긴 하지만 여전히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 같으므로 계속하자면) 우선 맥주는 와인과 다르며, 품위가 떨어지는 액체도 아니다.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에 의하면) 와인이 저녁 식사에 어울리는 술이라면, 맥주는 파티에 어울리는 술이다. 와인이 클래식이나 재즈를 들으면서 마시기 좋은 술이라면, 맥주는 로큰롤과 포크 음악에 어울리는 술이다. 품위와는 무관하다. 상황이나 장소나 분위기에 따라 다른 술을 선택할 뿐이다. 어떤 음식이 다른 음식에 비해 품위가 떨어진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맛있는 음식과 맛없는 음식은 나눌 수 있지만 품위로 음식을 나눌 수는 없다.

와인에 비해 맥주의 맛도 간단한 게 아니다. 우리가 자주 마시는 라거 계통의 맥주부터 최근 급속도로 유행이 번지고 있는 아이피에이(IPA: India Pale Ale)나 마이크로브루어리에서 만드는 맥주 등을 마셔보면 맥주의 맛 역시 도저히 글로 표현하기 힘든 넓이와 깊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한번도 맡아보지 못한 향을 맡을 수 있고, ‘사막에 내리는 비의 맛과 같다’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해야 할 만큼 묘한 맛을 경험할 수도 있다. 이젠 맥주도 와인만큼 복잡해졌다. 이전부터 복잡했지만 한국에서 이제 막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복잡해지기 시작했다는 건 그만큼 다양한 맥주를 찾게 됐다는 것이고, 다양한 취향이 생겨나고 있다는 뜻이다. 자신의 취향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게 튀어 보이지 않는 시대가 됐고, 맛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하고 맛있는 것을 찾아다니는 게 유난스럽지 않은 시대가 됐다. 와인의 전성시대가 앞서 있었다면, 이제 맥주의 전성시대가 펼쳐지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와인에 비해 맥주의 맛도 간단치 않다
라거부터 IPA까지
글로 표현하기 힘든
넓이와 깊이가 있다


한국 대형 맥주회사들의 고민이 여기서 시작된다. 눈앞에는 새로운 맛을 원하는 소비자들이 있고, 발목에는 정부의 가격 통제라는 족쇄가 채워져 있으며, 여전히 시원한 맥주를 싸게 마시고 싶어하는 소비자들도 있고, 수입 맥주의 판매는 매년 높은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다. 답을 구하기 어려운 고차원 방정식 문제 같다.

최근 불어닥치고 있는 에일 열풍은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구실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사실 에일 맥주의 맛은 한국 소비자들에게 무겁게 느껴질 수 있다. 상면발효맥주인 에일은 높은 온도에서 짧은 시간 발효시키고 일반 맥주보다 홉을 더 많이 넣기 때문에 탄산가스가 적고 쓴맛이 강하다. 시원하게 벌컥벌컥 마시기보다는 천천히 맛을 음미하면서 마시는 게 어울리는 술이다. 개인적으로 라거나 필스너 스타일의 맥주를 선호하고, 밀맥주나 에일 맥주를 자주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기사를 쓰기 위해 여러 종류의 에일 맥주를 마셔보았다. 지금도 맥주 한 병을 옆에 놓고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오스트레일리아 와인 특집 기사를 쓸 때와 비슷한 심정이다. 몇몇 에일은 기가 막히게 맛있고, 어떤 에일은 맛이 너무 강해서 도저히 참기 힘들다. 이런 맛을 글로 표현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다. 나무를 태운 것 같은 맛이 나기도 하고, 꽃향기가 나기도 하고, 난생처음 맞닥뜨린 맛이 나기도 한다. 국내에서 생산한 에일은 우리의 입맛을 고려해 만들어서인지 가장 무난하게 마실 수 있었다. 에일 맥주가 한국에서 지속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지 무척 궁금하다.

이제부터가 대형 맥주회사의 역할이 중요한 시점일 것이다. 대형 맥주회사에서 맛 좋은 에일을 성공적으로 판매한다면 에일 시장이 넓어질 것이고, 매장에서도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된다. 에일 시장이 넓어지면 다양한 맥주를 생산하는 소규모 맥주회사들도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취재를 갔던 공장에서 자신들의 연구소를 소규모 맥주회사들과 공유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우선 사람들이 맥주를 사랑하게 만들자는 게 이들의 공동목표일 것이라고 믿고 싶다.

맥주 공장에 가서 가장 놀랐던 것은 빈병을 재처리하는 설비였다. 수집된 빈병은 용기선별기를 통과한 뒤 세척되어 재사용된다. 깨끗하게 씻긴 빈병들이 거대한 기계에 차곡차곡 쌓이는 장면은 마치 질서정연한 군대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빈병에 다시 맥주가 가득 채워질 것이다. 맥주는 전국으로 옮겨져 사람들의 메마른 목을 촉촉하게 적셔줄 것이다. 맥주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장면은 엄숙하고 장엄해 보였다.

한국 맥주는 맛있어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앞으로 더 맛있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 최근의 몇몇 맥주들은 외국의 제품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맛있다. 물론 다양성에 있어서는 부족한 면이 많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일 테니 기대가 크다. 지금까지의 맥주 시장이 1.0 버전이었다면 이제 새로운 맥주 2.0 버전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

김중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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