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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2.19 19:50 수정 : 2014.02.20 13:59

일러스트레이션 김중혁

[매거진 esc] 김중혁의 메이드 인 공장
라면 공장 (상)

취재하기로 한 라면 공장은 고향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기차로 10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지만 가본 적은 거의 없다. 친구들과 한두번 놀러가 본 게 전부였다. 전날 고향집에 가서 잠을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부모님과 함께 아침을 먹었다.

고향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고 계신다. 어머니는 늦게 잠이 들고, 아버지는 일찍 잠에서 깬다. 일찍 일어난 아버지는 차마 어머니를 깨우지 못한다. 밥을 차려 달라고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어머니는 수십년 동안 밥을 차려 왔고, 아버지는 끊임없이 그걸 먹기만 했다. 아버지는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미역국을 싫어하지만, 어머니는 미역국에 고기를 넣지 않는다. 아버지는 불평하면서도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미역국을 먹을 수밖에 없다. 어머니는 가끔 미역국에 고기를 넣는다. 아버지는 일찍 일어난 아침에 라면을 끓여 드신다. 물을 끓이고, 봉지에서 꺼낸 라면을 끓는 물에 넣는다. 분말수프와 건더기 수프를 넣는다. 계란도 넣는다. 면이 익어가는 동안 아버지는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낸다. 접시에 덜지 않고 통째로 꺼내놓는다. 아버지의 아침 한끼가 그렇게 해결된다.

집에 가면 싱크대 한구석에 라면이 쌓여 있다. 아버지의 라면이다. 종류별로 한가득이다. 매일 아침 라면을 드셔야 하니 질리지 않게 종류별로 사놓은 것이다. 된장을 기반으로 한 라면, 얼큰한 라면, 면발이 굵은 라면, 세상에는 라면이 참 많다. 라면의 종류가 참 많아서 아버지에겐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버지가 요리하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냉장고 문을 여는 모습은 자주 봤지만 칼을 쥐고 재료를 자르거나 국의 간을 보거나 명절 때 전 부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언젠가 한번은 요리를 하셨겠지만 내가 본 적은 없다. 아버지가 라면을 끓이는 걸 본 적은 있다. 일 때문에 고향집에 내려가서 자게 됐는데, 아침 7시 싱크대에서 무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새벽에야 잠이 들었는데도 이상하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문을 살짝 열었더니 10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아버지의 거대한 등이 보였다. 아버지는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궁상맞아 보이기도 했고, 짠하기도 했다. 좀 제대로 차려 드시든가, 아니면 멋지게 굶으시든가, 그것도 아니면 어머니를 깨워서 밥을 차려 달라고 하시지 궁상맞게 라면이 뭔가 라면이…, 나는 문을 닫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아버지의 라면 먹는 소리가 들렸고, 그릇을 씻는 소리가 들렸다. 자꾸 아버지의 등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라면과 공장이
공유하는 단어가 압축이다
라면은 생활의 압축을 상징하고
공장은 산업의 압축을 상징한다
라면은 짧은 시간에
많은 칼로리를 제공하며
공장은 짧은 시간에
많은 제품을 생산한다


라면 공장에 한번쯤 가보고 싶었다. 거대한 기계에서 면이 뽑혀나오는 과정을 보고 싶었고, 기름에 튀겨지는 면의 소리를 들어보고 싶었고, 라면이 일사불란하게 포장되어 공장을 빠져나가는 장면을 보고 싶었다. 음식을 만드는 공장을 한 군데만 취재해야 한다면 당연히 라면 공장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라면만큼 공장과 잘 어울리는 음식이 또 있을까. 라면은 쉽고 간편하며, 많고 빠르고 다양하다. 라면을 끓이는 방법은 누구나 안다. 기본에서 조금씩 변주될 뿐이다. 550㎖ 물을 끓인 다음 면과 수프를 넣고 3분간 끓인 뒤 달걀과 파를 넣는다. 시간이 조금씩 달라지고, 면과 수프를 넣는 타이밍이 조금 달라질 뿐이다. 남들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부유한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보낸 사람이 아니라면, (어쩌면 그런 사람들까지도) 라면에 대한 추억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라면은 혼자서 밥 먹는 사람들의 외로움을 달래왔고, 사람들의 허기를 빠르게 만족시켰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요리가 라면일 것이며, (아버지처럼) 요리를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요리가 라면일 것이다.

내 상상 속의 라면 공장은 (말도 안 되게 비과학적인 상상이지만) 꼬불꼬불한 길이 수천 수만 개 나 있는 장소다. 반죽이 꼬불꼬불한 길을 통과하고 뜨거운 김을 쐬기도 하고 기름에 풍덩 들어가서 튀겨졌다가 기어나오는 장면을 상상하곤 했다. 직원들이 다니는 길 역시 꼬불꼬불하고, 정원도 꾸불꾸불하고, 라면을 싣고 나오는 트럭 역시 에스(S)자 코스 주행 시험 보듯 운전을 해야 하는 장소를 상상하곤 했다.

면을 꼬불꼬불하게 만드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면이 부서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직선으로 면을 뽑아내면 부서졌을 때 상품가치가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둘째 부피를 줄이기 위해서다. 더 좁은 곳에 더 많은 양의 면을 압축시키기 위해서는 꼬불꼬불한 면이 필수적이다. 라면 한 가닥의 길이는 약 65센티미터이고, 라면 한 봉지에는 대략 75가닥의 면발이 들어간다. 라면 한개의 총 면발 길이가 49미터에 달하니, 엄청난 압축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조리의 간편성도 중요한 이유다. 면이 꼬불꼬불하면 끓이는 시간도 줄어들고, 양념이 더 잘 묻게 된다. 라면과 공장이 공유하는 단어가 바로 압축인 셈이다. 라면은 생활의 압축을 상징하는 음식이고, 공장은 산업의 압축을 상징하는 장소이다. 라면은 짧은 시간에 많은 칼로리를 섭취할 수 있게 해 주며, 공장은 짧은 시간에 많은 제품을 생산한다.

라면 공장은 (바보 같은) 내 상상과 달리 여느 공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찌 보면 국수를 만들어내는 가내수공업적 생산방식을 크게 확대해놓은 모습일 수도 있다. 밀가루 반죽을 만든 다음 거대한 롤러로 반죽을 눌러 면대를 만든다. 다양한 굵기의 제면기를 통과하면서 만들어진 면은 스팀 박스를 통과하며 증숙 공정을 거친다. 둥근 형태의 라면은 둥근 갑에, 네모난 형태의 라면은 네모난 갑에 들어간 뒤 150도 정도의 기름에서 튀겨진다. 가장 재미난 공정은 거대한 반죽을 잘라서 면으로 만드는 것이다. 반죽이 올라가 있는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는 무척 빠르고, 면이 완성되어 나오는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는 느리다. 중간에 면을 자르는 칼이 있다. “뒤에서는 빨리 밀고, 앞에서는 천천히 가니까 꼬불꼬불하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공장 직원의 말을 듣는데, 그게 라면의 제조 공정을 설명하는 말 같지가 않았다. 아, 그런 것인가, 뒤에서 빠른 속도로 밀고 들어오는데, 앞으로 속도를 내지 못하면 결국 꼬불꼬불해지고 마는 것인가. 등을 떠미는 힘은 강력한데, 앞으로 나아가기가 머뭇거려진다면 결국엔 꼬불꼬불해지고 마는 것인가. 속도의 차이란 그렇게 직선이었던 것을 꼬불꼬불하게 만들고 마는 것인가. 직원의 한마디에 여러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라면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납면(拉麵)이다. 납면은 중국 북방에서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잡아 늘이면서 만드는 국수를 말한다. ‘납’은 끌고 당긴다는 뜻이다. 중국집의 수타면이 납면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손으로 잡아 늘이던 것을 공장에서는 롤러가 대신해서 납작하게 만든다. 커다란 덩어리를 밀고 당기면서 납작하게 만들고, 다시 늘여서 얇게 만든다. 얇게 만들어 포갠 반죽을 빠른 속도로 밀어내면서 꼬불꼬불하게 만든다. 어쩐지 이것은 라면 만드는 공정이 아니라 우리들이 사는 모습 같기도 하다. 공장에서 또 하나 재미있었던 것은 라면의 포장 모습이었는데, 이 얘기는 다음 회에 계속.

김중혁 소설가

※취재 협조 해주신 농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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