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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3.05 19:50 수정 : 2014.03.06 14:53

일러스트레이션 김중혁

[매거진 esc] 김중혁의 메이드 인 공장
라면 공장 (하)

컵라면을 처음 먹었을 때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뜨거운 물을 붓고 3분만 기다리면 요리가 완성된다니, 이 무슨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완성된 라면은 환상적인 맛이었다. 뜨거운 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컵라면을 먹을 수 있었다. 친구들과 피시방에서 게임을 할 때도 먹을 수 있었고, 도저히 일어나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할 때도 먹을 수 있었다. 끓여 먹는 라면이 엘티이(LTE)의 속도였다면, 뜨거운 물을 부어 먹는 컵라면은 엘티이-에이(LTE-A)급이라 할 수 있겠다. 라면의 가장 중요한 미덕은 간편함과 속도일 것이다.

라면 공장에서도 속도가 중요했다. 방문한 공장은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신라면의 고속 라인이 있었는데, 속도 때문에 생긴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자, 몰라도 그만인 기이한 라면 상식. 라면의 상표가 있는 곳을 앞면, 조리법과 주의사항이 적힌 곳을 뒷면이라고 해보자. 수프는 어디 들어 있을까. 다른 곳에서 생산되는 라면에는 앞면에 수프가 들어 있지만 고속화 라인에서 생산되는 라면에는 뒷면에 수프가 들어 있다.(완성된 라면이 컨베이어 벨트를 지나갈 때 그 위에 수프를 얹어야 하는데, 빠른 속도 때문에 수프가 계속 떨어지고 말았다. 결국 고속화 라인에서는 수프를 컨베이어 벨트 아래쪽에서 공급해 함께 포장한다.) 신라면을 사서 포장을 뜯었을 때 수프가 앞쪽에 있으면 저속 라인, 뒤쪽에 있으면 고속 라인에서 생산된 것이다. 맛의 차이는 없다고 하지만, 어쩌면 고속 라인에서 생산된 라면이 시원한 바람을 더 많이 맞았을 테니 맛도 더 화통하지 않을까. 속도를 경험해봤으니 더 빨리 끓지는 않을까. 미안하다, 농담이다.

공장에는 사람이 있다
사람을 빼고 공장을 말하는 것은
달의 전면을 보며 후면까지
상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너구리라면의 공정도 재미있다. 너구리라면에는 일반 라면의 수프에다 다시마를 추가로 투입해야 한다. 말린 다시마를 잘라서 투입하는 것인데, 기계로 처리하기가 불가능하다. 다시마 투입 기계가 있긴 하지만 성공률이 높지 않다. 하나하나 사람이 넣을 수밖에 없다. 다시마를 가루로 부순 다음 칩 형태로 성형하는 것도 고려했지만 다시마 형태가 사라지면 소비자들이 좋아할 것 같지 않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었다. 너구리라면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나 역시 반대한다. 다시마 기계화에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의외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너구리 라면을 자주 먹는 사람은 봉지를 열었을 때 두 개의 다시마가 짝 달라붙어 있는 ‘로또’를 경험한 적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나는 한 번 경험했다.) 대단한 행운은 아니지만 어쩐지 기분이 좋아진다. 이게 다 수작업 때문에 생기는 즐거움이다. 공장 입장에서는 작은 손실이 어마어마한 손실로 이어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런 식의 소소한 재미를 놓치고 싶지 않다. 누군가의 실수가 누군가의 기쁨으로 이어지는 일은 많지 않다.

라면 공장에 있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두 라인을 보면서 속도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일년 넘게 여러 공장을 구경 다니면서 속도와 사람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공장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직원이 할 일은 줄어든다. 어떤 공장은 기계가 대부분의 일을 하고, 어떤 공장은 기계와 사람이 사이좋게(라는 말이 좀 우습긴 하지만) 일을 나누어서 한다. 로봇 공학 분야의 개척자인 한스 모라베크는 “다음 세기가 되면 다양한 능력을 갖춘 저렴한 로봇들이 매우 광범위한 분야에서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것이기 때문에 완전 고용을 유지하려면 근로 시간이 실질적으로 0시간에 가까워져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2050년 이후 지구의 주인이 인간에서 로봇으로 바뀐다는 과감한 얘기도 했던 사람이다. 큰 공장을 다녀보면 모라베크의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를 만들고 생산하는 직원보다 기계를 지켜보는 직원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앞으로 공장에서 기계와 로봇의 비중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기계와 로봇이 전성기를 맞는다고 해서 실업자가 많아진다는 뜻은 아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에 종사하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된다는 뜻일까. 모든 사람이 서로의 즐거움을 위해 일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유토피아일 테지만 일이 그렇게 간단하게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과연 앞으로 어떤 세상이 올까. 모라베크의 전망처럼 서로의 즐거움을 위해 일하는 세상이 올까. 부유한 나라들은 그렇게 변해가고 있긴 하다. 인건비가 싼 나라로 공장을 내보낸 후, 새로운 직업들이 빈 곳을 채우기 위해 계속 생겨나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한국의 공장들은 어떤 식으로 변해갈까. 한국 역시 공장의 수가 줄어들고 있긴 하다. 메이드 인 공장을 진행하며 섭외에 어려움을 겪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젠 한국도 잘살고 있다는 뜻일까. 과연 그럴까. 잘 모르겠다.

인간은 기계를 만들었다. 기계는 산업화를 만들었고, 산업화는 더 많은 공장을 만들었고, 또한 노동 계급을 만들어냈다. 노동 계급은 더 많은 기계를 만들어냈고, 더 많은 기계는 더 나은 기계로 진보했으며, 더 많고 더 나은 기계는 노동 계급을 감소시키고 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기계와 로봇의 역습이 시작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기계가 생산해준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다시마만큼은 인간이 넣는 세계를 꿈꾸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기계는 더욱 진보할 것이다.

그동안 메이드 인 공장을 관심 있게 지켜봐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애초 목표는 단순한 것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이 공장에서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훔쳐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물건을 만든 장소에 가서 만드는 모습을 보면 물건을 좀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예상대로 공장은 그렇게 단순한 곳이 아니다. 공장에는 사람이 있다.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람이 만들어내는 일이다. 사람을 빼고 공장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달의 전면을 보며 후면까지 상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공장의 진짜 모습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복잡할 것이다. 내가 쓴 공장 이야기가 반쪽뿐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다. 한계는 명확하지만 한계 안에서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보았고, 열심히 썼다.

들여다볼 수 있도록 공장 문을 열어준 관계자분들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섣부른 얘기고 선입견이겠지만 공장에서 일하는 분들에게서 묘한 공통점을 느꼈다. 조심스럽고 다정한 서먹함이라고 해야 할까, 내성적이지만 호기심 어린 눈빛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걸 느꼈다. 공장은 대부분 시의 외곽이나 외진 곳에 있었다. 외진 장소에서 매일 같은 사람들과 같은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의 공통점일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추측했다. 내 추측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정한 서먹함과 호기심 어린 눈빛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꼭 고백하고 싶다. 혹시 있었을지도 모를 무례에 대해서는 사과하고 싶다. 내가 물었던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해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들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지면에 차마 쓰지 못한 이야기도 많았다. 그 이야기들은 아마도 가까운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풀어놓게 될 것이다. 그럴 때에도 공장에 대한 예의만큼은 잊지 않겠다. 마지막으로 기획과 섭외 과정에서 큰 도움을 준 esc 팀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동안 고마웠다. <끝>

김중혁 소설가

※김중혁의 ‘메이드 인 공장’은 이번 회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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