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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은 순간에 결정된다. 환자의 생명은 종국에는 하늘에 달렸지만 의사와 간호사 등 보건의료인들이 환자를 지키며 운명과의 사투를 벌인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흉부외과 수술실의 모습.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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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노환규의 골든타임
⑩ 연재를 마치며
교통사고로 들어온 소녀 환자인턴이 튜브를 갈아끼우다
근육 사이 길을 못 찾아
호흡정지된 긴박한 순간
보호자가 먹다 남긴 김밥 옆
나무젓가락이 생명을 살렸다 ‘승모판막 교체 후 좌심실 파열’
두 번 목격한 그 무서운 합병증
28시간 수술한 환자는 죽고
일찍 ‘포기’ 결단한 환자는
상식을 뛰어넘으며 살아났다 얼마 전 대한의사협회 조직이 개편되면서 새로운 총무이사가 들어왔다. 그는 나와 20여년 전 전공의 생활을 함께 한 후배였기에 오랜만에 그 시절 얘기를 나누었다. 그 얘기 중에는 병원에 갑작스러운 정전이 생겼을 때 일어난 사건도 있었다. 당시 흉부외과 당직실은 중환자실 안에 있었는데, 중환자실에는 인공호흡기 등 환자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기계장치가 있어서 정전이 되면 절대 안 됐다. 따라서 병원에는 정전 때 즉각 자동으로 돌아가도록 설계된 자가발전기가 있어 간혹 발생하는 정전에도 문제가 없었다. 소독 안 했지만…나무젓가락은 위대했다 어느 날 문제가 터졌다. 그날 새벽에도 나를 포함한 흉부외과 전공의 네 명이 당직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흉부외과 당직실에는 밤에도 불을 끄지 않는 관습이 있었다. 그런데 새벽 4시쯤 당직실의 불이 갑자기 꺼졌다. 당직실의 불이 꺼진 일은 처음이었다. 그 순간 전공의 네 명이 모두 일어나 중환자실로 달려나갔다. 본능이었다. 불이 꺼진 깜깜한 중환자실에서 희미한 초록색 비상등 불빛 아래 간호사들과 우리들은 순간적으로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던 환자와 그렇지 않은 환자들을 분류하고 어둠 속에서 앰부백(손으로 작동하는 인공호흡장치)을 찾았다. 그러곤 일사불란하게 인력을 배치해 환자에게서 인공호흡 기계장치를 떼고 손으로 인공호흡을 실시했다. 전기는 약 10분 뒤 돌아왔고 환자들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우리는 어떻게 불이 꺼지자마자 어둠 속에서 뛰쳐나갔는지를 얘기하며 서로 칭찬했다. 우리들의 결론은 긴장 속에 살면서 체득한 본능이라는 것이었다. 이 얘기가 끝나고 후배가 내게 물었다. “나무젓가락 사건 기억하세요?” “그럼, 기억나고 말고.” 20여년 전 전공의 3년차 때였다. 당시 수개월 파견을 나갔던 강원도 지역의 한 병원에는 교통사고 환자들이 많았다. 당시엔 영동고속도로가 중앙분리대 없이 편도 1차선이던 시절이었다. 가족과 함께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을 잃은 10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있었다. 사고가 난 지 약 3주쯤 지났는데 폐에 물이 찬 것 같다고 흉부외과에 의뢰가 왔다.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소녀는 목에 꽂은 관을 통해 호흡을 하고 있었다. 호흡이 불안정할 때 기도(숨길)를 확보하기 위해 숨을 쉬는 기관으로 입을 통해 튜브를 삽입하는 것이 통상적이지만, 이 기간이 길어지면 튜브로 인해 기관 협착이 우려되기 때문에 목에 구멍을 내어 직접 튜브를 삽입하는 것이다. 소녀를 진찰한 나는 폐 상태가 대수롭지 않은 상태여서 차트에 관찰을 요한다고 답변을 썼다. 이튿날 나는 후배와 함께 흉부외과 병동에서 회진을 돌고 있었다. 갑자기 스피커에서 ‘코드블루(심정지가 일어나는 등 의학적 응급상황) ○○병동’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녀가 있는 신경외과 병동이었다. 반사적으로 그 병동으로 마구 뛰었다. 내 예감이 맞았다. 소녀가 있는 방에 웅성웅성 의사들이 몰려 있었다. 그사이 벌써 10명 이상의 의사들이 모여, 1인실 방은 내가 들어설 틈도 없이 붐볐다. 비집고 환자를 들여다보니 어느 전공의가 환자 위에 올라서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고, 다른 두세 명은 환자의 목에서 빠진 튜브를 다시 넣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사건의 정황을 확인해 보니, 인턴이 목의 튜브를 갈아끼우는 상황에서 발생했다. 먼저 튜브를 뺀 뒤 새 튜브를 넣어야 하는데, 인턴이 튜브를 빼기는 했는데 새 튜브를 넣지 못한 것이다. 통상 목에 기관 삽관을 통해 튜브를 넣은 뒤에 열흘 정도 지나면 길(트랙)이 생겨서 새 튜브를 넣는 데 어려움이 없지만, 소녀의 경우에 길이 형성되어 있지 않아 새 튜브를 넣지 못했고, 그 과정에서 호흡 정지가 일어난 것이다. 이미 여러 의사들이 달려들어 노력하고 있었기에 나는 다시 뒤로 물러났다. 소녀는 이미 혀를 빼문 상태였고, 얼굴은 청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촌각을 다투는 순간 의사들이 계속 길을 찾았지만 소녀의 숨길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벌어진 근육들이 다시 가운데로 모이면서 길을 찾기 힘들어진 것이다. 병동에 비치된 여러 기구들을 가져다가 길을 찾아도 소용이 없었다. 그때 나의 눈에 번쩍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보호자가 먹다 남은 김밥 옆에 놓인 나무젓가락이었다. 나는 그 깨끗하지도 소독도 되지 않은 나무젓가락을 들고 의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나무젓가락을 이용하여 근육들을 하나씩 젖히자, 튜브가 들어 있던 구멍이 보이기 시작했다. 운 좋게도 길을 찾은 것이다. 나무젓가락으로 근육들을 잡아 구멍을 노출시키고 있는 동안 다른 의사가 튜브를 넣었다. 나무젓가락은 그 순간 그 어떤 의료기구보다 더 요긴하게 사용됐다. 소녀는 가까스로 죽음의 위기를 넘겼다. 만일 보호자가 사용하던 나무젓가락이 없었다면, 나무젓가락을 내가 발견하지 못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삶과 죽음은 순간에 결정된다. 피흘리는 심장 열고닫는 이들의 비애 비슷한 시기의 일이다. 50대 중반의 여성 환자의 판막(심장 안에서 문짝 구실을 하는 심장조직)을 교체하는 수술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환자의 집도의인 교수님은 먼저 심장을 멈춘 뒤 심장을 열어 승모판막(좌심방·좌심실 사이의 판막)을 교체했다.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나는 제1조수로 참여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지혈을 하던 가운데 어디에선가 피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알았다. 이리저리 찾아봐도 출혈 부위가 발견되지 않았다. 나중에 심장을 들어서 안쪽을 보니, 좌심실 뒤쪽에서 가느다란 물줄기처럼 피가 나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쪽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수십 년의 심장수술 경력을 가진 교수님도 처음 보는 상황이었다. 교수님은 고개를 흔들며 조심스럽게 봉합을 시도했다. 실을 잡아매는 순간 조금 전보다 더 큰 출혈이 발생했다. 고심하던 교수님은 한번 더 시도했지만 출혈량이 늘어났다. 바로 그때 교수님은 알아차렸다. 승모판막 교체술 직후 매우 드물게 일어나는 좌심실 파열이 발생한 것이다. 몇 가지 원인이 추정되고 있지만 정확한 원인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데다 워낙 드물어서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교수님도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결국 다시 심장을 멈추게 한 뒤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단단히 지혈을 했지만 심장을 다시 뛰게 하면 출혈은 다시 시작됐다. 시간이 계속 흘렀다. 해결 방법은 없었다. 방법이 없으니 심장을 다시 멈추고 지혈을 하기를 여러 차례, 출혈은 멎지 않고 심장 기능은 점점 떨어져갔다. 출혈이 계속되니 인공심폐기를 멈출 수 없었다. 출혈이 계속되는 심장을 바라보는 심정은 무기력하기만 했다. 아침 8시에 시작한 수술이 저녁 8시를 지나 밤 12시가 되었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침이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수술을 시작한 이튿날 낮 12시에 우리는 인공심폐기를 단 채, 환자를 중환자실로 옮겼다. 희망 없는 선택이었다. 수술을 시작한 지 꼭 28시간 만이었고, 나는 그중 27시간을 수술에 참여했다. 중간에 한 시간을 휴식과 화장실 이용을 위해 다른 사람과 손을 바꿨을 뿐이다. 교수님은 화장실을 다녀온 단 몇 분 말고는 줄곧 환자의 곁을 지켰다. 환자는 결국 예상대로 사망했다. 많은 의료진이 밤을 새우며 수고했지만 환자는 살아남지 못했다. 28시간 수술이 주는 피곤함도 있었지만, 나는 의사가 아무런 해결 방법이 없이 무기력한 상황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충격에 빠졌다.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몇 달 뒤 어느 지방 병원에 파견을 나간 나는 그곳에서 운 나쁘게도 똑같은 상황을 맞게 됐다. 그 드물다는 ‘승모판막 치환술 후 좌심실 파열’이라는 무서운 합병증을 불과 수개월 간격으로 경험하게 된 것이다. 환자는 밝고 쾌활한 성격의 65살 할머니였다. 너무 성격이 밝고 해맑아서, 세상에 아무런 걱정이 없이 사시는 분 같았다. 할머니의 승모판막 치환 수술이 끝날 즈음, 예전에 경험했던 것과 똑같은 모양으로 출혈이 시작됐다. 이런 경험을 처음 맞은 당시 과장님은 당황하시면서 지난번의 그 교수님처럼 봉합을 하려고 했다. 순간 나는 과장님께 과거 경험을 말씀드렸다. 그러나 그는 일단 일차 봉합을 시도했고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몇 차례의 시도로 출혈량이 크게 늘어났다. 출혈량이 늘자 잠시 생각하시던 과장님은 더 이상의 수술적 방법은 도움이 안 될 것이라며 온갖 지혈제를 모두 동원하여 심장 주변을 메웠다. 사실 교과서에 나오는 원칙은 아니었다. 좌심실 파열로 인해 발생하는 출혈은 그런 방법으로 중지될 출혈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장님은 사실상 환자를 포기한 것이었다. 출혈이 지속되는 심장 주위를 지혈제로 메운 과장님은 곧바로 수술실을 나가 수술 중 문제가 발생했는데 환자가 살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보호자에게 설명했다. 지금 같으면 납득이 어려운 얘기겠지만, 20여년 전 지방 병원에서는 심장수술은 매우 어려운 수술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보호자의 이해를 구할 수 있었다. 나는 과장님이 ‘포기’라는 결단을 일찍 내린 덕택에 28시간을 수술실에서 보내던 지난번과 달리 불과 몇 시간 만에 환자를 데리고 중환자실로 나올 수 있었다. 수술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기는 그 순간에 이미 과도한 출혈로 심장은 거의 제대로 뛰지 않고 있었다. 심장 박동도 정상이 아니었고, 최소 90㎜Hg는 넘어야 하는 수축기 혈압은 40~50㎜Hg 내외를 넘나드는 등 60㎜Hg를 넘지 못했다. 쇼크 상태가 지속되면서 콩팥 기능이 유지되지 않아 소변도 나오지 않았다. 심장은 언제라도 곧 멎을 듯했다. 할머니가 운명을 맞이할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천진난만한 성격의 할머니의 해맑은 얼굴이 떠올랐다. 심장이 제대로 뛰지 않고 혈압이 떨어졌기 때문에 수술 부위에서 나오는 피를 밖으로 빼내는 튜브에서는 출혈량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것을 좋아할 상황은 아니었다. 심장이 곧 멎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곧 돌아가실 것 같던 할머니의 혈압이 밤 12시쯤이 되자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희망을 가질 수는 없었다. 좌심실 파열이라는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도 아니고, 지나치게 낮은 혈압과 심장기능 저하로 쇼크 상태가 오래 지속돼 할머니의 뇌도 손상을 입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새벽이 되자 혈압은 조금 더 올랐다. 아침이 되자 혈압은 80㎜Hg까지 올랐다. 처음으로 희망을 가지기 시작했다. 소변은 여전히 나오지 않고 있었다. 출혈량은 크게 줄어 있었다. 쇼크 상태가 지속되면서 좌심실로부터의 출혈 압력이 낮자 지혈이 된 것 같았다. 희망이 보였다. 과장님은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중환자실로 달려와 환자 상태를 확인하고는 매우 놀라워했다. 그날 저녁 환자의 혈압은 정상으로 돌아왔고 이튿날 소변이 나오기 시작했다. 수술 이틀 뒤 환자는 인공호흡기를 뗄 수 있었고 수술 열흘 뒤 다른 환자들과 똑같이 퇴원했다. 뇌 손상도 전혀 없었다. 인명은 재천이라더니, 할머니는 의사들이 갖고 있던 의학적 상식을 멋지게 뛰어넘어 건강하게 웃으면서 퇴원했다. 그 의사와 간호사들을 기억해주세요 골든타임 연재를 시작하면서 오래전 기억들을 떠올렸다. 내 머릿속에 뚜렷이 떠오르는 몇몇 환자들이 있었다. 수많은 환자들 속에서도 유난히 기억이 남았던 분들은 대부분 안타깝게 놓친 환자들이거나 의사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를 보여준 환자들이었다. 10회의 연재를 통해 채 담지 못했던 웃지 못할 사건과 감동적인 사건도 여럿 있었다. 환자의 생명은 하늘에 달렸지만 그 곁에는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그들과 환자를 돕는 많은 보건의료인들이 있었다. 만일 어느 기업에서 신입사원 입사 면접 때 입사 조건으로 첫째, 한달 중 절반 이상을 야간당직을 해야 하고 둘째, 하루 당직비는 1만원이며 셋째, 당직을 한 다음날에도 정상적인 근무를 해야 한다고 조건을 내건다면 그 기업은 과연 신입사원을 뽑을 수 있을까? 전공의는 이런 신입사원의 노동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 만일 어느 기업에서 직원을 뽑으면서 입사의 첫째 조건이 임신 시기는 회사와 상의해서 할 것, 둘째 조건은 낮 근무와 밤 근무를 의무적으로 수시로 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까? 간호사가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 오늘도 불이 꺼지지 않는 병원에는 환자의 생명을 붙잡기 위해 노력하는 보건의료인들이 있다. 소방수가 돈을 벌기 위해 불길에 뛰어들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직업을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많다. 그들의 노력이 있기에 누군가는 생명을 선물받고 그 가정은 행복을 되찾을 수 있다. 그들의 헌신이 존중과 응원을 받는 사회가 됨으로써 그들이 기쁘게 일하고 그 노력이 다시 국민에게 회복의 기쁨으로 돌아가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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