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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5.03 19:06 수정 : 2013.05.03 20:12

범죄를 얼마나 오래 숨길 수 있을까? 아내와 아들을 살해하고 일본으로 도주한 대학교수가 우연하게 붙잡혔다는 뉴스가 2008년 10월 전국 일간지와 방송에 일제히 실렸다. 당시 기사는 짧게 다루고 지나쳤지만, 한 인간이 어떻게 범죄의 사슬에 얽혀드는지 보여준다. <와이티엔>(YTN) 2008년 10월26일치 보도(왼쪽)와 <동아일보> 등 10월27일치 신문 기사.

[토요판] 표창원의 죄와벌
<12> 불륜 교수의 살인과 도피

안방 이불 위 불에 탄 채
발견된 엄마와 6살 아들
시신 얼굴은 부어있었다
남편이자 아빠인 대학교수
배아무개씨는 사라졌다

법원의 선언적 배상판결만이
유족을 위로하는 듯했다
범인은 내연녀 박씨와 함께
일본으로 도피해 평생을
잘 먹고 잘 살 것만 같았다
그러나 교통사고를 내면서…

‘낡은 천년이 끝나고 새 천년’이 시작된다는 ‘뉴 밀레니엄’의 긴장과 흥분이 세상을 휘감던 1999년 12월31일 늦은 오후, 서울 노원구 중계동의 한 아파트 주민들은 쓰레기를 태우는 듯한 악취에 코를 막아야 했다. 냄새는 저 아래 분리수거장이 아닌 가까운 집 어딘가에서 연기와 함께 새어 나오고 있었다. 주민들은 그 냄새가 끔찍한 살인사건의 흔적이라는 것을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얼마 뒤 연기와 악취는 잦아들었고 주민들도 불쾌함을 잊고 연말 축제 분위기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2주가 지난 2000년 1월13일, 그 아파트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이 안 되고 있는 딸과 손자의 안전이 염려된다는 고향 할머니의 신고전화 때문이었다. 아무리 초인종을 누르고 전화를 해봐도 안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경찰은 아파트 경비원들을 입회시킨 뒤 시건장치를 해제시키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거실은 깨끗했다. 하지만 안방 문을 열자 참혹한 광경이 펼쳐졌다. 엄마와 아들로 보이는 두 구의 주검이 이불 위에서 불에 심하게 탄 채 누워 있었던 것이다. 피해자들의 신원은 곧 밝혀졌다. 서울의 한 대학교 배아무개(37) 교수의 아내(32)와 아들(6)이었다.

“신년맞이 해외여행” 처갓집에 거짓 전화

곧이어 과학수사반이 현장에 도착했다. 현관문과 뒷베란다, 창문 등 외부 침입 흔적을 면밀히 조사했지만 발견할 수 없었다. 부엌과 거실 등 생활공간 역시 별다른 특이점이나 화재, 다툼 혹은 격투의 흔적 역시 없었다. 오직 주검이 발견된 안방에서만 화재가 발생했다. 그것도 시신들과 시신들이 놓인 이불 위만 불에 타 있고 그 위 천장만 그을었을 뿐 다른 곳은 멀쩡했다. 참 이상했다. 산소와 연소재를 찾아 움직이고 번지는 불의 특성에 맞지 않는 현장 모습이었다. 전기장판과 난로 등 전열기가 있었지만 누전에 의한 화재로는 보이지 않았다. 우연한 화재 발생 이후 자연스럽게 진화가 된 것이라기보다는 특정 부위에만 불이 붙도록 ‘통제된 발화’를 한 뒤 불이 크게 번지기 전에 인위적으로 진화를 한 모습이었다. 특히 ‘식용유’ 성분이 두 시신과 이불에 잔뜩 뿌려져 있었다는 사실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 확인이 되었다. 주검들 역시 외관상 특별한 외상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얼굴이 많이 부풀었고 눈 부위가 크게 돌출되어 섬뜩했다. 목이 졸려 숨진 ‘액사’ 이후 시간이 경과되어 부패가 일어났을 때 주로 관찰되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온몸이 직간접적으로 불에 타거나 익어 훼손 정도가 심했다. 나중에 나온 부검으로 확인된 사망 원인 역시 목이 졸려 숨진 액사, 즉 ‘타살’이었다.

다만 두 주검 모두 호흡기에서 소량의 ‘황산’이 검출돼 독극물이 사용된 것인지 여부에 대해서 논란이 일었다. 뚜렷한 외부 침입이나 도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강도나 성폭행 목적으로 배달이나 검침 등을 가장해 침입한 뒤 저지른 범죄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정황은 피해자들을 잘 아는 ‘면식범’의 소행일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었다.

주민 대상 탐문수사와 현장 수사, 국과수의 부검 및 감정 등을 토대로 재구성한 살인과 방화 발생 시점은 1999년 12월31일. 그런데 가족의 우려로 신고가 이루어져 주검이 발견된 것은 이로부터 2주 뒤인 2000년 1월13일이고 피해자들의 남편이자 아버지는 발견되지 않았다. 더욱이 신년인사를 주고받아야 할 1월1일부터 2주 동안 연락이 없었는데, 가족은 왜 진작 신고를 하지 않았을까? 수사 결과 피해자들의 남편이자 아버지인 배 교수가 1월1일 처갓집에 전화를 하면서 ‘가족이 모두 외국으로 신년맞이 여행을 가는데 경황이 없어 자신이 대신 새해인사를 전한다. 당분간 전화가 안 돼도 걱정 마시라’고 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경찰은 배 교수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출입국사실조회’를 하자 의문을 증폭시키는 결과가 나왔다. 배 교수가 1월1일 혼자 일본으로 출국한 뒤 사흘 뒤인 1월4일에 귀국했다가 주검 발견 이틀 전인 1월11일에 다시 일본으로 출국한 것이다. 경찰의 추가 조사 결과, 배 교수는 그 1주일 동안 자신의 아파트를 담보로 은행에서 6000만원을 대출받은 뒤 자신의 제자 6명에게 각 1000만원씩 준 뒤 서로 다른 은행에서 여행자수표로 환전해 오라고 지시한 뒤 이를 들고 재출국한 사실이 확인됐다.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를 교묘히 빠져나간 지능적인 수법이고, 이미 사망해 불에 탄 상태로 누워 있는 아내와 아들의 시신이 있는 아파트에 들러 관계서류를 들고나와야 성공할 수 있었던 행동이었다.

경찰은 수사과정에서 배 교수에게 내연녀가 있다는 정황을 확보했다. 일본의 한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있는 박아무개(30)씨였다. 그런데 박씨는 배 교수가 입국한 다음날인 1월5일 귀국해 자신의 재산을 정리한 돈 7000만원을 가지고 배 교수와 같은 날 같은 비행기로 일본으로 출국한 사실이 추가로 확인됐다. 경찰은 일본 출국 후 연락이 닿지 않는 배 교수를 아내와 아들에 대한 살인 및 방화 혐의로 입건하고 기소중지한 뒤 인터폴에 국제수배 조처를 요청하고 외교부에 여권 무효화 조처를 신청했다. 내연녀 박씨 역시 공범으로 입건하고 수배했다. 두 사람은 이제 한국과 일본은 물론 전세계 경찰에 의해 추적을 당하는 ‘국제적 도망자’ 신세가 된 것이다. 두 사람은 종적을 감췄고 일본 경찰도 이들 ‘불법체류 살인 방화 용의자 커플’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정말 촉망받는 30대 대학교수가 ‘사랑에 눈이 멀어’ 아내와 친아들마저 잔혹하게 살해하고 주검에 불을 지른 뒤 그 현장에 다시 돌아와 집문서와 도장을 챙겨 도피자금을 마련해 연인과 함께 도피행각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가 이해하지 못할 다른 사연이 있는 것일까? 이대로 진실은 묻히고 악질 반인륜 흉악범죄의 혐의를 받는 두 남녀는 앞으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게 될 것인가?

악몽 시달리면서도 영원한 도피를 꿈꾸다

사건 발생 넉달 만인 2000년 5월14일, 배 교수가 재직했던 대학교는 경찰의 수배를 받고 해외 출국 이후 연락이 닿지 않아 새 학기가 시작돼도 강의 등 업무를 수행하지 않는 배 교수에 대해 직권면직을 결정했다. 사건 발생 뒤 1년 5개월이 지난 2001년 5월30일, 서울지방법원 북부지원 민사1부는 배 교수의 처가에서 배 교수를 상대로 낸 위자료 청구소송에서 “피고는 자신의 부인과 아들에게 독극물이 든 음료수를 먹여 살해한 뒤 이를 불태운 것으로 추정된다 … 배씨가 살해 사실을 속이고 주검을 2주 동안이나 집 안에 유기해 유족들로 하여금 유족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는 극도의 죄책감에 시달리게 한 점이 명백하므로 피고는 금전적으로나마 이를 배상해야 한다”고 선언하며 1억1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물론 피고 배 교수가 참석하지 않은 궐석재판이자, 배 교수로 하여금 실제로 이 금액을 지급하도록 할 아무런 실효적 수단이 없는 ‘선언적인 판결’이었다. 유족으로서는 피의자들의 해외도피로 인해 아무런 진척이 없는 형사사건 대신에 민사사건으로라도 법정에서 배 교수의 ‘유죄’를 인정받았고, 그래서 한 맺힌 고인들의 원혼을 조금이나마 달래줄 수 있었다는 작은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배 교수와 내연녀 박씨는 배 교수가 결혼 전 대학원 조교 시절 학생으로 만나 알게 된 사이였다. 그저 친한 선후배 사이였던 두 사람은 배 교수가 결혼 후 일본 유학을 하는 기간 동안 일본 연구소에 근무하던 박씨를 다시 만나면서 불륜 관계가 시작되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모교의 교수가 된 배씨는 박씨와의 관계를 지속하다 사건 발생 약 1년 전인 1999년 초에 외도 사실을 아내에게 들키게 된다. 두 사람의 불륜 관계가 시작된 이후 배 교수가 쓴 논문의 약 3분의 2에 박씨가 공동저자로 등재돼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은 가까웠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아내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고 부부 사이엔 적대감과 분노만 쌓였다. 배 교수는 적반하장 격으로 아내에게 지속적으로 이혼을 요구했고, 아내는 이를 거부해 오던 중이었다. 그러다 결국 이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두 사람이 전재산을 끌어모아 마련한 도피 자금 1억3000만원과 일본 유학 및 취업 경험은 당분간 들키지 않는 은둔을 보장했다. 초기엔 죄책감과 두려움, 불안에 휩싸여 고통스러운 나날들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연인끼리의 공범의식으로 서로를 위로하면서 나름의 재미와 행복을 느끼는 안정된 도피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의 신분을 도용해 ‘고쿠라’라는 도시에서 한국 식당 체인점을 운영하게 되면서 경제적인 안정도 찾을 수 있었던 두 사람은 간혹 불에 타고 무섭게 일그러진 피해자들의 모습이 나타나는 악몽에 시달리긴 했지만, 소박한 일상의 즐거움으로 상쇄시키며 점점 ‘보통 사람’의 ‘보통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대로 영원히 ‘죄와 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8년9개월 만에 잡혀 무기징역 심판

그러나 결국 그 안도와 행복, 희망이 긴장을 완화시켰고 조금씩 과감해지기 시작하면서 사달이 났다. 2008년 10월2일, 작은 교통사고를 내게 된 것이다. 교통경찰의 신분조회 결과 주소지와 신분 내용에 이상이 발견됐고, 지문 및 사진 조회 결과 두 사람이 신분증에 있는 재일동포가 아니라 한국 경찰에 의해 인터폴에 지명수배된 ‘국제범죄자’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두 사람은 같은 달 24일, 8년9개월 동안의 일본 도피생활을 마감하고 한국으로 강제송환됐다. 이들의 신병을 인계받은 한국 노원경찰서는 이틀 뒤인 2008년 10월26일 두 사람을 구속했다.

9년 만에 수사를 재개한 경찰은 배 교수와 박씨를 강하게 추궁했다. 두 사람의 진술로 채워진 진실의 나머지 조각들은 이렇다. 1999년 12월30일 밤 내내 이혼 요구를 받아들여주지 않는 아내와 격한 말다툼을 하던 배 교수는 다음날 아침 7시,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아내의 목을 졸라 살해하고 만다. 그 후 잠이 깬 6살 아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하루 종일 놀이터 등을 헤매던 배 교수는 오후 3시쯤 돌아와 아들에게 ‘엄마 옆에서 잠을 자라. 이 비닐봉지를 쓰고 자면 잠이 잘 올 거야’라며 아들의 얼굴에 비닐을 씌운 뒤 질식시켜 살해했다. 본인은 그 뒤 자신도 자살을 시도했다고 주장하지만 그 흔적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아들의 죽음을 확인한 배 교수는 부엌에서 기름을 가져와 주검과 이불에 뿌린 뒤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주검과 주변에 남은 자신의 범행 흔적이 불에 충분히 탔다고 자신할 수 있을 정도가 되자 불을 꺼 주민 신고와 소방차 출동 등의 불리한 상황을 미연에 방지했다. 이후 집 안 모습을 의심받지 않도록 정리하고 잠을 잔 뒤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짐을 챙겨 나와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 사이 처갓집에 전화해 가족이 함께 외국으로 여행을 간다고 말하며 당분간 신고하지 못하게 하는 꼼꼼함을 보였다.

일본에서 내연녀 박씨를 만나 범행사실을 털어놓은 뒤 서로 공모하여 도피자금을 마련하기로 하고 대담하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혹시 의심을 받지 않도록 하루 차이로 서로 다른 비행기를 타고 입국한다. 각자 대출과 재산 처분 등으로 급하게 1억3000만원을 마련한 두 사람은 같은 비행기로 일본으로 출국한 뒤 잠적한 것이다.

서울지방법원 북부지법 형사11부는 배 교수에게 살인과 사체손괴 혐의로 무기징역과 추징금 7840만원, 공범 박씨에 대해서는 사후 범인 은닉 및 도주 방조 혐의만 적용해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일본 유학을 거쳐 37살에 모교 교수가 된 최고의 엘리트와 그에 버금가는 외국 연구소 연구원의 치밀한 범행과 도피는 법망을 피해 성공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인간도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없으며 우연을 예측할 능력은 없다. 결국 자신의 통제 범위 밖에서 발생하는 사건과 우연에 의해 거짓은 드러나게 되며 죄는 밝혀지게 된다. 때로 그 과정에 수년에서 수십년, 혹은 수백년이 걸릴 때도 있지만. 모든 죄짓는 자들, 죄를 지으려 하는 자들이 명심해야 할 사실, ‘정의는 때로 천천히, 하지만 반드시 온다’를 재확인해 준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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