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1.23 18:11
수정 : 2013.02.21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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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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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이동미의 머쓱한 여행
남자 둘과 필리핀 여행을 가게 됐다. 둘 다 숫기라곤 없는 총각들이다. 이 중 한명의 마닐라 친척집에 머물며 보라카이를 여행할 생각이었다. 초성수기여서 비행기 좌석을 못 구해 마닐라 현지인들이 주말에 자주 놀러간다는 민도로섬에 다녀오기로 했다.
섬으로 들어가는 배를 기다리는데, 승객이 달랑 우리 셋이었다. 하지만 배에 타고 보니, 기다란 뒷좌석에 필리핀 여자들이 일렬로 앉아 있었다. 우리가 타는 순간 그녀들은 갑자기 휘파람을 불고, 윙크를 날리며 까르르 웃고 난리가 났다. 나와 함께 탄 건장한 두 남자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녀들 모습이 어째 영 어색하다. 긴 생머리를 하긴 했는데, 몇몇은 얼굴이 영락없는 남자 얼굴이고, 목소리도 굵다. 어떤 애는 거뭇거뭇한 콧수염 자국도 있다. 그렇다, 그들은 트랜스젠더였던 것이다. 알고 보니 그녀들은 금요일마다 섬으로 들어가 해변의 야외 바에서 술을 팔고, 월요일이 되면 섬을 나오는 생활을 하는 친구들이었다. 그들 중엔 하리수를 꼭 닮은 정말 예쁜 언니도 한명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모두들 하리수를 알고 있었다.
숫기 없는, 심지어 한명은 해외여행이 아예 처음인 이 순박하다 못해 애처로운 남자애들은 일찌감치 겁을 먹고 거의 뱃머리에 달라붙을 정도로 맨 앞자리에 앉았다. 뒤도 못 돌아보고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얼음 자세로 한 시간을 갔다. 내가 그녀들에게 웃으며 얘기를 해보려 하자, 이 겁먹은 남자들은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말 시키지 마! 말 시키면 죽는다, 너’ 하는 뜻의 입모양만 나를 향해 뻐끔거렸다.
어느덧 민도로섬에 도착. 숙소도 정하지 않고 들어온 우리는 맘에 드는 방갈로를 찾아 몇 군데를 돌아다녔는데, 그때마다 그녀들이 자기네가 묵는 숙소로 오라며 손짓 발짓에, 휘파람을 불고 손키스를 해댔다. “야, 저기는 죽어도 안 돼!” 남자애들은 결사반대를 외치며, 허름한 방갈로를 잡아 나를 집어넣었다. 그래도 섬은 아름다웠다. 해변은 화이트비치로 새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바다도 기대 이상으로 맑고 예뻤다. 수영도 하고, 쨍쨍한 햇빛에 누워 선탠도 하며 해가 질 때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밤이 되자, 해변은 아까 그녀들이 일한다는 야외 바의 불빛들로 점점이 빛나기 시작했다.
“맥주 마시러 가야지!” 이리하여 우리들의 ‘비치 바 호핑’이 시작됐다. 배 안에서는 눈도 못 마주치더니, 그새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그녀들이 일하는 바를 가보겠다며 순순히 따라왔다. 낮에 만났던 그녀들은 난리가 났다. 산미구엘을 한병, 두병 마시는 사이 모두 기분이 좋아졌다. 트랜스젠더 언니들은 바 안에 있다가 우리 자리 옆으로 몰려와서는, 구릿빛 남자들의 몸도 은근히 만지고, 기어이 무릎에 앉아보려는 시도까지 했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 된 두 친구의 모습을 보느라 나는 웃다 쓰러질 뻔했다. 그래도 우리는 그녀들과 유쾌한 이야기를 나눴고 나중에는 적은 돈이나마 팁도 줬다. 약은 티가 조금 났지만 대체로는 착했다. 하지만 연신 나의 짧은 청치마가 너무 예쁘다며 나중에는 아예 노골적으로 달라고 조르던, 남자 티가 줄줄 나는 언니한테 끝까지 치마는 주지 않았다. 그럼 난 뭘 입고 가냐!.
이동미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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