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5.08 18:09
수정 : 2013.05.08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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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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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이동미의 머쓱한 여행
내가 서울 다음으로 좋아하는 도시가 베를린이다. 낡은 벽면을 자유롭게 타고 오르는 그라피티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과 아티스트들이 만들어내는 생생한 음악과 작품, 그리고 그것들을 즐길 수 있는, 말 그대로 언더그라운드한 클럽과 갤러리들이 넘쳐나는 도시다. 누구나 아티스트가 되는 도시, 나는 그 자유롭고 창조적인 분위기에 매료돼 베를린에서 한달을 넘게 산 적도 있다.
때는 12월, 추워도 너무 추운 한겨울이었다. 크리스마스에는 모두 고향으로 내려가 가족과 함께 보내는 터라 텅 빈 도시를 경험했다. 좀비만 돌아다닐 것 같은 적막한 도시에는 레스토랑도 문을 열지 않아 밥도 굶을 뻔했다. 크리스마스와는 달리, 12월의 마지막날은 도시가 미친 것 같았다. 모두들 신나는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거리로 나와 샴페인과 술을 마셨다.
베를린에서 디스코 디제이로 활동하는 친구의 초대로 아주 특별한 ‘뉴 이어스 이브’(New Year’s Eve) 파티에 가게 됐다. 집을 빌리고 친구들을 불러 하는 파티라기에 그냥 작은 하우스 파티인 줄로만 알았는데, 가서 보니 공사도 끝나지 않은 빈 건물의 2개 층을 빌려서 하는 비밀 파티였다. 아는 사람들끼리 사전에 이메일로만 신청을 받으며, 이름을 밝히고 입장료 20유로를 낸 뒤, 200명만 들어갈 수 있었다. 공사중인 건물이라 난방도 잘 안되고, 창문은 비닐 같은 것으로 막아뒀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날 파티의 테마였던 그리스 신화의 신들처럼 충실하게 차려입고 나타났다. 머리에 월계수 왕관을 쓰고 어깨에는 흰 천을 두르고 발끝까지 늘어뜨린 옷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베를린의 클럽 문화가 그렇듯, 이곳에도 ‘약’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우리에게는 허용된 문화가 아니니 사실 처음 베를린에 갔을 때 가장 충격적으로 보였던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뉴스에서 보는 것처럼 퇴폐적이고 위험한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스 용병처럼 은색 가짜 철모를 쓰고 종이상자를 뒤집어쓴 남자가 작은 컵에 비밀 음료를 만들어 팔았다.(사진) 한 잔에 5유로, 친구가 한 잔씩 사서 일행한테 돌렸는데, 그 음료에는 마약 성분이 들어 있다고 했다. 세상에! 그럼 이제 머리가 몽롱해지고, 핑핑 돌면서 기분이 이상해지는 건가 싶었지만, 웬걸, 정신은 말똥말똥했다. 김이 다 빠져버린 사이다를 마신 듯 뭔가 밍밍하고 시시한 마무리였다.
하지만 이날 파티 분위기만큼은 최고였다. 서너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는 공간에는 디제이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출 수 있는 곳, 술을 마시는 바, 작은 스티로폼 알갱이들이 눈처럼 쌓여 있어 사람들이 뒹굴고 놀 수 있는 라운지 등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곳의 모든 음식과 술은 공짜였다. 우리는 부지런히 술병을 날라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셨다. 정신을 차려보니 날이 훤히 밝아 있었다. 파티는 아침 7시까지 계속됐다. 베를린에서는 흔한 클럽 풍경이었다.
어떤 파티는 금요일 밤에 시작해 일요일 밤까지 논스톱으로 열리기도 한다. 지금은 없어진 ‘바 25’라는 곳이 이 파티로 유명했다. 사람들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모처럼 해가 쨍쨍하게 뜬 아침 거리로 나왔다. 새해 아침이었다.
이동미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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